파주(坡州) 낙수(落水) 남편에 있는 승(僧) 신수(信修)의 암자에는 오늘밤에 무슨 일이 있는 모양으로 불빛이 절 밖에까지 비치어 흐르며 흥에 겨운 듯한 사람들의 말소리까지 드믄드믄 들려온다.
때는 여말(麗末) 홍건적의 난리입네, 김용(金鏞)의 반란입네 하고 온 나라가 물끓듯하건만 이 파주 한 고을만은 세상사를 등진듯이 지극히 평화하게 지내가는 터이다.
『또 이 화상 한잔 하시나보군.』
하고 마침 그 암자 앞을 지나가던 사람 하나가 발을 멈추고 절 속을 기웃거렸다.
윤백남(尹白南, 1888년 11월 7일 ~ 1954년 9월 29일)은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대한민국의 예술인이다. 배우, 극작가, 소설가, 언론인, 영화감독, 연극 제작자, 영화 제작자 등을 다양한 직업을 겸했다. 본명은 윤교중(尹敎重)이다.
충청남도 공주군 출신으로 어릴 때는 한학을 공부했다. 한성부로 올라와 신학문을 익힌 뒤 1904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대한제국 관비 유학생으로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기도 했으나, 학비 지원이 끊겨 도쿄고등상업학교로 옮겨 졸업했다.
귀국 후 보성전문학교 강사가 되었고, 한일 합방 조약이후로 매일신보 기자가 되어 문필 생활을 시작했다. 1912년에는 조중환과 함께 한국에서 두 번째 신파극 극단인 문수성(文秀星)을 창단하여 1916년 해산될 때까지 번안 신파극을 공연하고 배우로도 활동했다. 문수성이 해체된 후 반도문예사(半島文藝社)를 설립하여 월간 잡지 《예원(藝苑)》을 발간하였다. 이기세, 이범구 등과 극단 예성좌(藝星座)를 조직하고, 1917년에는 백남(白南) 프로덕션을 창립,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감독하여 영화계에 선구적인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