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희는 1925년 카프에 참가하면서부터는 이기영, 한설야와 함께 사회주의를 공부하는 모임을 이끌기도 하고 , <농촌 사람들>, <아들의 마음> 등의 단편을 써서 프로소설의 형성,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들 단편들은 초기 시, 희곡의 낭만성과 관념성을 극복,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농촌의 궁핍상, 노동자, 농민의 계급적 연대와 사회주의 이상을 담아냈다.
호는 포석, 필명은 목성, 적로. 중앙고보를 다니다가 1914년 중퇴했다. 1919년 3.1운동에도 참가하여 몇 달 동안의 구금 생활을 한 바 있으며, 그 해 겨울 일본에 건나가 동양대학 철학과에서 수학했다. 유학 시절에는 잠시 무정부주의 계열의 흑도회라는 사상단체에 가입하여 1923년 희곡 「파사」를 발표하고, 1924년에는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간행하였다.
1925년 8월 카프가 결성되자 그 창립 위원으로 참가하여, 생활고나 지식인의 가정 생활에 대한 환멸을 그린 「땅 속으로」,「R군에게」,「저기압」등과 자신들의 농토에서 간도나 일본 등지로 이주하거나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고 마는 식민지 농민들의 가혹한 현실을 문제 삼은 「농촌사람들」,「마음을 갈아먹는 사람」,「새 거지」등의 작품을 계속 발표했다.
한편 1927년에 발표한 대표작 「낙동강」을 통해 농촌 현장에서의 삶의 변혁을 모색하는 인물을 서정성 짙은 묘사력으로 부조해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28년 7월 소련으로 망명하여 연해주 지방의 조선인 교포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그 해에 산문시 「짓밟힌 고려」등을 발표했다.
그 외 장편 소설 「붉은 깃발 아래서」와 「만주 빨치산」등을 집필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1934년 소련작가동맹 창건시에는 그 맹원으로 활동하다가 1936년부터 하바로프스크 시에서 작가동맹 원동 지부에서 일했으며, 잡지 『노력자』의 조국 책임 편집위원을 지냈다. 1937년 스탈린의 지시에 의해 중앙 아시아 지방으로 강제 이주 당했으며, 일제의 간첩이란 죄목으로 1938년 4월 15일에 총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스탈린 사후인 1956년에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