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의 단편소설이다. 세종시대, 양녕대군과 정향의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민들의 탄식성을 뒤에 남기고, 대궐에 들어간 양녕은 그의 아우님인 왕(세종대왕)께, 편전에서 뵈었다.
"전하. 신께 삼사 삭(朔)의 수유(受由)를 허하시면 능히 신의 평생지원(平生之願)을 이룰까 하옵는데 성의(聖意)가 어떠하오신지?"
그 날도 형님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고 형제의 의를 들을 때 기회를 보아 양녕은 아우님께 이런 청을 하였다.
"형님의 평생지원이란 어떤 것이오니까. 동생이 왕위에 있어서 능히 이를 수 있기만 한 것이라면 형님의 평생지원이야 못 이루어 드리리까?"
왕도 미소하면서 이렇게 응하였다.
"다름이 아니오라, 서경(西京)은 명승지지로 고래로 이름이 높사오며, 단군·기자의 끼치신 터로 이 나라의 후인으로서 한번 반드시 찾아야 할 곳 — 시절은 바야흐로 춘삼월 꽃때오니, 한번 이름에 듣던 을밀대, 부벽루며, 성천, 무산십리 등 선경을 완상하오며 젊은 호기를 한번 뽑아보오면 겨를 한철의 음산하던 기분을 모두 한꺼번에 씻을 수가 있을까 하옵니다. "
김동인 ( 金東仁 1900 ~1951)
본관 전주. 호 금동(琴童) ·금동인(琴童人) ·춘사(春士). 창씨명(創氏名) 곤토 후미히토[金東文仁]. 평남 평양 출생. 일본 도쿄[東京]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졸업,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畵學校]를 중퇴하였다. 1919년 최초의 문학동인지 《창조(創造)》를 발간하는 한편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고 귀국하였으나, 출판법 위반 혐의로 일제에 체포 ·구금되어 4개월 간 투옥되었다. 출옥 후 《목숨》(1921) 《배따라기》(1921) 《감자》(1925) 《광염(狂炎) 소나타》(1929) 등의 단편소설을 통하여 간결하고 현대적인 문체로 문장혁신에 공헌하였다.
이광수(李光洙)의 계몽주의적 경향에 맞서 사실주의적(寫實主義的) 수법을 사용하였으며, 1925년대 유행하던 신경향파(新傾向派) 및 프로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를 표방하고 순수문학 운동을 벌였다. 1924년 첫 창작집 《목숨》을 출판하였고, 1930년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동아일보》에 연재, 1931년 서울 행촌동(杏村洞)으로 이사하여 《결혼식》(1931) 《발가락이 닮았다》(1932) 《광화사(狂畵師)》(1935) 등을 썼다. 1933년에는 《조선일보》에 《운현궁(雲峴宮)의 봄》을 연재하는 한편 학예부장(學藝部長)으로 입사하였으나 얼마 후 사임하였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붉은 산》 《태형》《김연실전》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