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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전집179: 원수로 은인

군언(君彦) 이주국(李柱國)이 무과총사(武科總使)로서 처음으로 제장을 통솔하여 한강의 모래밭에 군기를 배열하고 습진(習陣)을 벌린 것은 정조 기유(正祖己酉) 이월, 부는 바람도 아직은 으시시한 이른 새벽이었다. 『무(武)는 숙(肅)이니, 제장의 명을 준용하라.』 『군법에 거역하는 자는 일호의 가차 없이 처형 하리라.』 높이 우는 말의 울음. 새벽 바람을 타고 흩어지는 포라 소리. 눈코 뜰 수 없이 어수선한 사이로, 목소리를 가다듬어 이 같이 명령을 내리는 주국의 태도는 말할 수 없이 늠름하였다.
군언(君彦) 이주국(李柱國)이 무과총사(武科總使)로서 처음으로 제장을 통솔하여 한강의 모래밭에 군기를 배열하고 습진(習陣)을 벌린 것은 정조 기유(正祖己酉) 이월, 부는 바람도 아직은 으시시한 이른 새벽이었다.

『무(武)는 숙(肅)이니, 제장의 명을 준용하라.』

『군법에 거역하는 자는 일호의 가차 없이 처형 하리라.』

높이 우는 말의 울음. 새벽 바람을 타고 흩어지는 포라 소리. 눈코 뜰 수 없이 어수선한 사이로, 목소리를 가다듬어 이 같이 명령을 내리는 주국의 태도는 말할 수 없이 늠름하였다.

윤백남(尹白南, 1888년 11월 7일 ~ 1954년 9월 29일)은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대한민국의 예술인이다. 배우, 극작가, 소설가, 언론인, 영화감독, 연극 제작자, 영화 제작자 등을 다양한 직업을 겸했다. 본명은 윤교중(尹敎重)이다.


충청남도 공주군 출신으로 어릴 때는 한학을 공부했다. 한성부로 올라와 신학문을 익힌 뒤 1904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대한제국 관비 유학생으로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기도 했으나, 학비 지원이 끊겨 도쿄고등상업학교로 옮겨 졸업했다.

귀국 후 보성전문학교 강사가 되었고, 한일 합방 조약이후로 매일신보 기자가 되어 문필 생활을 시작했다. 1912년에는 조중환과 함께 한국에서 두 번째 신파극 극단인 문수성(文秀星)을 창단하여 1916년 해산될 때까지 번안 신파극을 공연하고 배우로도 활동했다. 문수성이 해체된 후 반도문예사(半島文藝社)를 설립하여 월간 잡지 《예원(藝苑)》을 발간하였다. 이기세, 이범구 등과 극단 예성좌(藝星座)를 조직하고, 1917년에는 백남(白南) 프로덕션을 창립,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감독하여 영화계에 선구적인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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