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씨. 그에게도 명씨가 없을 리는 없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의 이름을 내놓기가 어려운 것뿐이다.
이미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니, 그의 고향을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 만 그가 조선 사람이었던 것만 알면 그만이다.
그-무영씨인 그를 편의상 A라고 부르자.
A가 열 일곱 살 되던 해에 그의 고향을 뛰어난 것은 까닭이 있다-. 아버지가 애매한 죄에 몰려서 감사 모에게 갖은 악형을 당하고, 수천석 타작하던 재산의 대부분을 빼앗긴 것을 알게 되매, 분을 참지 못한 것이었다.
그때에는 나라 정사가 어지러워서 당시 정권을 잡았던 M씨 일족이 감사요, 목사요 하고 전국에 좋은 벼슬을 다 차지해 가지고 양민을 잡아들여서는 재물을 빼앗기를 업을 삼을 때다. 서울에 큼직만한 집의 기앗장이 이렇게 빼앗아 올린 양민의 피 아닌 것이 얼마나 되나, A는 일본으로 뛰어가서 얼마 동안 준비를 해가지고 동경의 육군 사관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때 육군사관학교에는 A밖에 B,C,D,E,F의 무명씨들이 십여인이나 유학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개 나이가 비등하고 또 일본에 온 동기도 대동소이 하였다. 지금은 비록 천하를 말하고 국가를 논하지마는, 애초에 집을 떠난 동기는 대개는 권문세가에 원통한 일을 당한 집 자재로서, 한 번 톡톡히 원 수를 갚고 설치를 하자는 것이었다.
B는 양반에게 선산을 빼앗겼고, C는 그 아버지가 양반에게 수모를 당하였고, D는 그 아버지가 양반에게 재산을 빼앗겼고 등등.
그러나 그들이 육군 사관학교에 다니는 동안에 일본군인의 의기와 애국심을 보고는 처음 오던 조그만한 동기를 버리고 천하, 국가를 경륜하고 큰 뜻을 품게 되었다.
1910년 메이지학원 보통부 중학 5학년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정주 오산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이해에 언문일치의 새 문장으로 된 단편 〈무정〉을 《대한흥학보》에 발표하였다. 그해 7월에 백혜순(白惠順)과 중매로 혼인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애정 없는 혼인을 후회하며 실망의 나날을 보냈다.
1912년 나라를 잃은 슬픔과 자신의 장래에 대한 번민으로 건강을 많이 상하였다. 오산학교 재직시에는 톨스토이를 애호하면서 학생들에게 생물진화론을 가르쳤다고 하여 교계에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913년 스토(Stowe, H. E. B.) 부인의 〈검둥이의 설움〉을 초역하여 신문관에서 간행하고, 시 〈말 듣거라〉를 《새별》에 발표하였다. 그해 11월 세계여행을 목적으로 상해에 들렀다가 1914년 미국에서 발간되던 《신한민보 新韓民報》의 주필로 내정되어 도미하려고 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귀국하였다. 김병로(金炳魯)·전영택(田榮澤)·신석우(申錫雨) 등과 교유하며 사상가 내지 교육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1915년 9월 김성수(金性洙)의 후원으로 재차 도일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한 뒤 이듬해 1916년 9월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 광범위한 독서를 하였다. 계몽적 논설을 《매일신보》에 연재하여 문명(文名)을 높이고, 이듬해 1917년 1월 1일부터 한국신문학사상 획기적인 장편 〈무정〉을 연재하였다.
이어서 〈소년의 비애〉·〈윤광호〉·〈방황〉을 탈고하고 《청춘》에 발표하였다. 격심한 과로 끝에 폐환에 걸려 1917년 귀국, 《매일신보》 특파원으로 남한지역 오도답파여행(五道踏破旅行)을 떠났다. 1917년 두번째 장편 〈개척자〉를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청년층의 호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