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선생은 이즈음 뭘 하나?”
나는 어떤 날 K 박사의 조수로 있는 C를 만나서 말끝에 이런 말을 물어보았다.
“노신다네.”
“왜?”
“왜라니?”
“그새 뭘 연구하고 있었지?”
“벌써 그만뒀지.”
“왜 그만둬?”
“말하자면 장난이라네. 하기야 성공했지. 그렇지만 먹어주질 않으니 어쩌나.”
“먹다니?”
“글쎄. 이 사람아, 똥을 누가 먹어.”
“똥?”
“자네 시식회에 안 왔었나?”
“시식회?”
C의 말은 전부 ‘?’였다.
“시식회까지 모를 적에는 자네는 모르는 모양일세그려. 그럼 내 이야기해줄게 웃지 말고 듣게.”
이러한 말끝에 C는 K 박사의 연구며 그 성공에서 실패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맬서스라나…… ‘사람은 기하학급으로 늘어나고 먹을 것은 수학급으로밖에는 늘지 못한다’고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지 않나. 박사의 연구도 이 말을 근본 삼아가지고 시작되었다네.
김동인金東仁(1900~1951)은 1900년 평양에서 기독교 장로이자 백만장자였던 아버지 김대윤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금동. 아버지 김대윤은 일찍이 안창호, 이승훈 등 서북 출신의 애국지사들을 집으로 초대해 구국의 방법을 토론함으로써, 소년 김동인은 자연스럽게 시국의 정세에 관심을 가졌다. 기독교 계통의 평양 숭실중학교를 중퇴하고 도일, 메이지 학원 중학부에 입학하면서 비로소 문학에 눈뜨기 시작했다. 이때 같은 학교에는 소학교 동창인 시인 주요한이 다니고 있었는데, 김동인은 문학 서적을 대량으로 구입해서 그와 돌려 보면서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웠다고 한다. 메이지 학원 중학부를 졸업한 김동인은 가와바타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미술학교를 선택한 것은 그림을 배우려는 것보다는 ‘미학에 대한 기초지식과 그림에 대한 개념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훗날 술회한 바 있다. 김동인이 한국 문단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19년, 19세의 나이에 자비를 들여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 문예 동인지 '창조'를 통해서였다. 이 잡지에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이후 예술을 위한 예술 혹은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면서 평생 순수문학의 외길만을 고집했다. 오늘날 김동인은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순수문학자이자 단편소설의 완성자로 평가받는다. 작가 생활 30년 동안 ‘문학’ 이외에 다른 직업을 일절 가져본 적이 없는 그는 말년에는 오랜 지병인 불면증과 병마에 시달리다가 1951년 1월 6ㆍ25 전쟁이 한창인 적 치하의 서울에서 쓸쓸하게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