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조 ( 李海朝 )가 지은 신소설. 1908년 대한서림(大韓書林)에서 출간하였다. 중국 만청(晩淸)의 견책소설(譴責小說)인 장자(壯者)의 〈 소미추 掃迷 恃 〉 에서 영향을 받고 이해조가 창의성을 가미한 작품이다. 내용은 개화기를 배경으로 하여 미신타파를 다루었으며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함진해는 가세도 넉넉하고 식자(識字)도 있지만 자손 복이 없어 낳는 아이마다 기르지 못하다가, 세 번째 부인 최 씨를 맞아 아들 만득을 얻게 된다. 그런데 최 씨는 노들 무당촌에서 자라났으므로 아들이 감기에만 걸려도 무당 판수를 불러들이며, 또한 첫 부인과 재취부인의 여귀(女鬼)가 붙은 까닭이라고 내세운다. 함진해는 아내 최 씨에게 요사한 미신의 헛됨을 훈계하지만 최 씨 부인은 듣지 않는다.
만득이 천연두에 걸리자 최 씨 부인은 함진해가 지어오는 약은 쏟아버리고 굿에만 치성을 드리다 결국 아이를 잃게 된다. 이에 굿의 영험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부정이 든 때문이며, 이는 남편의 탓이라고 한다. 결국 최 씨는 다시 죽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무당 금방울을 불러 대대적인 굿을 벌인다. 이 때, 금방울이 대안동 네거리에서 함진해가 회오리바람을 만난 장면을 눈물을 흘리며 명창으로 엮어나가자, 함진해도 무당의 농간에 빠져들게 된다.
이후 이들은 사촌 동생 함일청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다시 자식을 얻으려고 선조의 산소를 옮겨 장사를 다시 지내는 등 무당 · 판수 · 지관의 농간 때문에 패가망신에 이른다. 마침내 함씨 문중에서는 종회를 열어 함일청의 아들 함종표로 종가를 잇게 한다. 함종표는 이들을 극진히 모시면서 미신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고 신학문을 공부한 뒤 판사가 되어 사악한 무리를 징계해 나간다.
작자는 이 작품에서 몽매한 부녀자들이 미신에 현혹되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제시하는 동시에 그 비합리성과 부당성을 지적, 설득한다. 또한 신학문을 공부하고 미신을 비판적으로 보는 대조적인 인물을 설정하여 종래의 병폐였던 미신숭배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특히, 다른 신소설들처럼 근대적 의식이 표면에만 부분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미신에 침혹되는 과정과 그 비과학성이 핵심적인 내용을 이루고 있어 미신타파라는 계몽성과 근대적 주제의식이 잘 형상화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해조(李海朝)
1869(고종 6) ∼ 1927. 신소설 작가. 본관은 전주(全州). 필명은 우산거사(牛山居士) · 선음자(善飮子) · 하관생(遐觀生) · 석춘자(惜春子) · 신안생(神眼生) · 해관자(解觀子). 호는 동농(東濃) · 이열재(怡悅齋). 경기도 포천 출생.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 ( 麟坪大君 )의 10대 손이며, 철용(哲鎔)의 3남 1녀 중 맏아들이다.
어려서 한문 공부를 하여 진사 시험에도 합격했으나 신학문에 관심을 두어 고향인 포천에 청성제일학교(靑城第一學校)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활쏘기와 거문고 타기가 취미였으며, 특히 국악에 조예가 깊었다.
1906년 11월부터 잡지 ≪ 소년한반도 少年韓半島 ≫ 에 소설 〈 잠상태 岑上苔 〉 를 연재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주로 양반가정 여인들의 구속적인 생활을 해방시키려는 의도로 실화(實話)에 근거하여 소설을 썼다.
1907년 대한협회 ( 大韓協會 )와 1908년 기호흥학회 ( 畿湖興學會 ) 등의 사회단체에 가담하여 신학문의 소개와 민중계몽운동에 나서기도 하였고, 한때 ≪ 매일신보 ≫ 등의 언론기관에도 관계하면서 30여 편 이상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의 문학적 업적은 크게 작품을 통하여 이룩한 소설적 성과와 번안 · 번역을 통한 외국작품의 소개, 그리고 단편적으로 드러난 근대적인 문학관의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창작소설을 중심으로 볼 때 〈 자유종 自由鐘 〉 (1910)은 봉건제도에 비판을 가한 정치적 개혁의식이 뚜렷한 작품이다. 특히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신교육의 고취, 사회풍속의 개량 등 개화의식이 두드러져 있다. 형식면에서는 토론소설로서 새로운 신소설의 양식을 시도하였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