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과 함께 1930년대 시문학파를 이끌었던 박용철은 이 시를 자신의 문학의 출발점이라 했다. 1925년에 쓰여진 이 시는 당시 문단의 절망과 허무의식을 그대로 담고 있다. 1920년대의 허무와 절망이란 식민지 현실과 3·1운동 실패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박용철은 첫 연과 마지막 연을 동일한 어구로 반복하는 것과 동시에 `나 두 야 간다'라고 의도적으로 띄어 쓰기로 떠나가는 자신의 안타까움과 비장함을 강조했다. 화자가 떠나가는 이유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으나, 떠나가지 않으면 화자는 젊은 나이를 눈물로 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의 절박함이 있다는 것은 시를 통해 알 수 있다. 눈물로 가득한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나가는 화자의 마음이 편할 수 없는 것은 `쫓겨가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다는 것은 절망의 눈물로 젊음을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조국강토와 민족을 버리고, 즉 `아늑한 항구를 버리고, /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는' 것은 결국 절망적 상황에 쫓겨가는 것과 다름 없다. 게다가 떠나가서 닿는 곳도, 의지가 되어 줄 `앞 대일 언덕'도 없이 암담한 곳이기 때문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으로 눈물을 흘리며, `발에 익어 정든 산골짜기'뿐 아니라 바람에 모양 변하는 구름마저 화자에게는 정겹고 슬프게 보이는 것이다. 희망도 없는 곳으로 어쩔 수 없이 떠나가는 젊은이의 비장한 각오와 심정을 `나 두 야 간다'라고 띄어 쓴 시행에서 엿볼 수 있다. 마치 희망적이지 못한 상황으로 쫓겨가는 슬픔과 회한 속에서도 그것을 극복하리라는 의지를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듯하다.
이 시에 나타난 비애는 당대의 현실이나 삶의 표랑 의식과 관계가 있다. 절망적인 현실을 벗어나려는 노력과 떠남에도 `앞 대일 언덕' 같은 희망이 없는 당시의 상황에 대한 비애가 바로 이 시를 포함한 박용철 시의 주제적 특징이다. [해설: 이상숙]
박용철(朴龍喆)
1904∼1938. 시인. 본관은 충주(忠州). 아호는 용아(龍兒). 전라남도 광산(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출신. 아버지 하준(夏駿)과 어머니 고광 고씨(高光高氏, 혹은 長澤高氏)의 4남매 중 장남이다. 1916년 광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하였다가 바로 배재학당(培材學堂)으로 전학하였다. 그러나 1920년 배재학당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자퇴, 귀향하였다.
그 뒤 일본 동경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를 거쳐 1923년 동경외국어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이어서,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몇 달 만에 자퇴하였다. 16세 때 울산(蔚山) 김씨 회숙(會淑)과 혼인하였다가 1929년 이혼하고, 1931년 5월 누이동생 봉자(鳳子)의 이화여자전문학교 친구였던 임정희(林貞姬)와 재혼하였다.
재학 중 수리과목에 재능을 보였는데,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오야마학원 재학 때에 사귄 김영랑(金永郎)과 교우로 관계하면서 비롯되었다. 문단 활동 이외의 경력은 전혀 없다. 1930년대에는 사재를 털어 문예잡지 ≪시문학 詩文學≫ 3권, 1931년에는 ≪문예월간 文藝月刊≫ 4권, 1934년에는 ≪문학 文學≫ 3권 등 도합 10권을 간행하였다.
또한 그가 주재하였던 시문학사에서 1935년 같은 시문학동인이었던 정지용(鄭芝溶)의 ≪정지용시집≫과 김영랑의 ≪영랑시집≫을 간행하였다. 문단 활동으로는 자신이 주축이 된 시문학동인 활동과 ‘해외문학파’,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참여하여 입센(Ibsen,H.) 원작의 ≪인형의 집≫ 등 연극공연을 위한 몇 편의 희곡을 번역하였다. 정지용 등과 시집과 문예지를 간행하는 등 문학 활동에 전념하면서도 자신의 작품집은 내지 못하고 1938년 서울에서 후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30년 3월 ≪시문학≫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싸늘한 이마〉·〈비내리는 날〉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뒤로 ≪문예월간≫·≪문학≫ 및 기타의 잡지에 많은 시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발표되지 않고 유고로 전하여지다가 뒤에 전집에 수록된 작품도 상당수에 달한다.
“나 두 야 간다/나의 이 젊은 나이를/눈물로야 보낼거냐/나 두 야 간다”로 시작되는 대표작 〈떠나가는 배〉는 어딘가 정박지를 찾아 떠나가는 ‘배’에다 인생을 비유한 작품이다. 즉, 인정과 고향을 되돌아보는 현실과 ‘삶’의 행정(行程) 속에서 아무런 마련도 없이 또 다른 정박지를 향하여 떠나가는 이상과의 내적 갈등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1938년 ≪삼천리문학 三千里文學≫에 발표된 〈시적 변용에 대해서〉는 지금도 널리 읽혀지는 그의 대표적인 평론으로서 그의 시작이론(詩作理論)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의 시는 같은 시문학동인인 정지용이나 김영랑의 시를 못 따르지만, ≪시문학≫·≪문예월간≫·≪문학≫ 등 문예지를 간행하였고, 방대한 역시편(譯詩篇) 등을 통하여 해외문학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점은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큰 공적이 되고 있다.
지나치게 서구문학사조에 편향되어 혼류를 이루었던 1920년대 문단을 크게 전환시켜 ‘살’과 ‘피’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보다 높은 차원의 시창작, 즉 ‘민족언어의 완성’이라는 커다란 과제를 제시하였던 것이다. 유해는 고향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 우산리에 안장되었고, 광주공원에 영랑의 시비와 함께 그의 시비도 건립되어 있다. 시비에는 대표작 〈떠나가는 배〉의 한 절이 새겨져 있다.
유작집으로 ≪박용철전집≫ 2권이 각각 1939·1940년 동광당서점에서 간행되었고, 대표적 평론으로 〈효과주의비평론강 效果主義批評論綱〉(1931)·〈문예시평 文藝時評〉(193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