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는 1924년 ‘영대’ 창간호에 연재되었된 김동인의 소설이다.
잠깐 여관에 돌아왔다가 나는 곧 다시 나섰다. 그것은 ○에게서 ○자기에게 아내의 품행이 나쁜 것 같다고 가르쳐 준 사람이 A씨임을 들었으므로 A씨를 찾아가서 좀 구체적으로 알아보려 함이었었다.
그러나 전차로써 의주통(義州通)까지 이를 동안에 나는 A씨 방문을 그만두기로 하였다. 아직 알지도 못하는 A씨를 찾아가는 것도 싫지만 그것보다도 씨에게 그런 일을 묻는 A 것은 ○의 인격을 무시함과 같아서 재미없는 일이다. 이제○의 취할 길은 그 사건을 남에게 절대로 비인(非認)을 하여 얼마간이라도 남의 의심을 덜게 하는 것이지 자기 스스로까지 제 아내의 품행을 의심한다는 것은 ○의 명예를 위하여 결코 취할 길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그 후막(後幕)에 숨어서 결코 ○의 명예를 손상치 않게 사건을 해결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전차를 내려서 곧 돌아서서 벗들과 약속하였던 ××극장에 가서 그때 갓 조직된 어떤 극단의 연극을 구경하고 돌아와 자버렸다.
1900년에 평양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신 선생은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청산학원 중학부를 졸업한 뒤에 처음에는 화가가 될 작정으로 천단(川端)미술학원에 재학중이다가 중도에 뜻을 달리하여 문학의 길을 택하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춘원 이광수 선생의 {무정}이 있었을 뿐으로 순문학 작품은 아직 형태조차 없던 시대건만, 어려서부터 외국문학을 섭렵하신 선생은 기미독립운동이 전개되던 1919년에 독립만세의 봉화가 터지기보다 한 달 앞서 도쿄에서 순문학잡지 {창조}를 발간하였다.……신문학운동의 봉화인 그 잡지는 순전히 선생의 사재로서 발간되었던 것이다.
{창조} 발간 이후 김동인 선생은 30여 년간 오로지 문학의 길로만 정진하셨다. 문학자가 문학도에 정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는 하겠으되, 문학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는 딱한 사정에서 거개의 우리나라 문인들이 문학 이외에 반드시 생계를 위한 별도의 직업을 가졌건만, 선생만은 조석이 마루한 극도의 빈한(貧寒) 속에서도 오직 문학만을 일삼으셨던 것이다. 오직 한 번 조선일보사 문예부장에 일시 취임했던 일이 있으나, 선생은 그 길이 아님을 이내 깨닫고, 1주일 만에 단연 그 자리를 물러 나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