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사]를 易言[이언]하며 易做[이주]하랴. 하물며 不才[부재]·無學[무 학]·減識[감식]이 余[여]와 如[여]한 者[자]로오녀. 다만 반만년의 壁光 [백광]이 愈沈愈.(유침유투)하되 憂之[우지]하는 者[자]와 無[무]하며, 不 然[불연]하기를 圖[도]하는 者[도] 尤.[우선]하니 是[시] 어찌 可[가]히 放置[방치]할 者[자]랴. 於是[어시]에 聞[문]을 八域[팔역]에 求[구]하며 神[신]을 千秋[천추]에 騁[빙]하여, 行住坐臥[행주좌와]에 是究是索[시구시 색]한 지 今[금] 一[일] ○[공]餘[여] 閱年[열년]이로다. 頃[경]에 少閒[소 한]을 因[인]하여 舊箚(구차)를 略整[약정]하매 더욱 短劣[단열]함을 覺 [각]할지라, 敢[감]히 手民[수민]을 勞[노]함은 써 自劾[자핵]을 代[대]함 이로라.
한국의 문인 겸 문화운동가이며 사학자이다. 한국 최초의 잡지 <소년>을 창간하고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창작하는 등 개화기 신문화 운동의 선구자였고, 시조 부흥 운동을 지도하여 최초의 시조 시화집 <백팔번뇌>를 출판하기도 하는 등 신문화와 전통문화의 과도기를 살았던 인물이며, 3·1 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을 작성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