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의 거의 울 때가 되었다. 이렇게 깊은 밤에 ─ 더욱이 넓은 들 한가운데의 외로운 마을에 사는 사람 기척이 있을 리는 없으나, 그래도 득춘(得春)은 귀를 기울여 사람 기척이 있나 없나 가끔가끔 바깥을 살핀다. 그러나 바깥은 한결같이 고요할 뿐이요, 다만 이웃 마을의 개 짖는 소리가 멀리 들릴 뿐이다.
득춘은 이와 같이 한참 동안이나 두 팔로 무릎을 에워싼 채 펑퍼짐하게 앉아 무엇인지 생각하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난 듯이 세운 무릎을 아래도 내려놓으며 조끼 호주머니에서 궐련 한 개를 끄집어낸다. 그것을 대물부리에 찔러 사기 등잔불에 대고 뻑뻑 빨기 시작한다. 대추씨만 한 석유 불은 궐련과 대물부리를 통하여 전부가 그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그리하여 그다지 밝지 못한 방 안이 더욱 어두컴컴해버린다. 그 궐련 끝에서 등불 빛보다도 더 붉은빛이 희멀건 연기 가운데에서 두세 번 반짝거리더니 꺼질 듯한 불이 다시 살아나며 방 안이 환하게 밝아진다.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윤상(李允相)이다. 보성고등보통학교와 일본 니혼 대학 신문과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일본 유학 전에 잠시 부안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시인 신석정을 문학의 길로 이끈 일화가 있다.[1] 이익상은 신석정의 사촌 매부가 되기도 한다. 니혼 대학에 다니면서 당시 유행하던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고 진보적 문예운동에 뛰어들었다.
1921년에 《학지광》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며 소설가로 등단했다. 1923년 파스큘라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25년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을 발기했다. 작품 활동은 1920년대 중반에 주로 집중된다. 단편 소설인 〈광란〉, 〈흙의 세례〉, 〈쫓기어 가는 이들〉 등을 발표했다. 작품 경향은 사회주의에 대한 지향은 분명하지만 살인이나 방화 등이 등장하지 않아 전형적인 신경향파 작품과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익상은 이상적인 사회주의를 지향한 지식인 작가로 평가된다.
1920년에 호남신문 사회부장을 지내며 언론인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1924년에는 조선일보 학예부장, 1928년에는 동아일보 학예부장을 거쳤고, 1930년부터 5년 동안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편집국장 대리로 재직했다. 1935년 지병인 동맥경화와 고혈압으로 사망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언론/출판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