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부산발 신경행 급행 열차 식당 안에서 비루병과 일본술 도쿠리를 지저분히 벌려놓은 양탁(洋卓)을 새에 두고 앉았다. 마침 연말 휴가로 귀향하던 도중 우리는 부산서 서로 만난 것이다. 넷이 모두 대학 동창이요, 또 모두가 같이 동경에 남아서 살고 있었다. 한 사람은 광고쟁이 한 사람은 축산 회사원, 한 사람은 조선신문 동경지국 기자, 그리고 나. 우리들은 기실 대학을 나온 이래 이렇게 오랜 시간 마주 앉아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래 우리는 만취하기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드디어 술에도 담배에도 이야기에도 시진하였다. 그때에 신문 기자는 이 열차에 오를 적마다 머릿속에 깊이 박혀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 하나 있노라 하며 다시 우리들의 주의를 이끌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김사량(金史良, 1914년 3월 3일~1950년 10월 ?일)은 평양 출생의 소설가, 희곡 작가로 재일 한인 문학의 효시로 여겨지는 작가이다. 일제 말기 식민지 조선의 소설가, 희곡 작가. 일본어와 조선어 모두 작품을 남겼다. 1914년 3월 3일 평양부 인흥정 458의 84번지에서 출생했다. 김사량은 필명이고 본명은 시창(時昌)이다. 모친과 아내가 열렬한 기독교인으로 전해진다. 1940년 재일 조선인을 다룬 단편소설 <빛 속에>로 조선인 최초로 아쿠다가와 상 후보에 선정되었다. 여러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일본 문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1941년 12월 9일 태평양 전쟁 발발 다음날 예방검속법에 의해 구금되었다.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 독일문학과를 졸업하고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독어교사로 부임했다. 일제 학도병 위문단원으로 중국에 파견된 틈을 타 연안으로 탈출, 조선의용군에 입대하여 각종 희곡과 르포를 썼다. 이 때의 경험을 쓴 <노마만리>는 르포문학의 걸작이자 귀중한 사료로 꼽힌다. 1945년 8월 해방을 맞아 귀국한 다음 북한 문학조직 정치활동 및 대학 강의, 창작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지만 비김일성계파이기에 작품집에 실을 작품이 누락되는 등 부침을 겪는다. 1947년 시인 구상의 데뷔 작품집인 시집 <응향> 검열위원으로 관여했다. 이후 약 2년 간 침묵을 지키다가 1950년 6.25 종군 작가로 남하하여 종군기를 집필한다. 같은 해 10월경 강원도 원주 문막 부근에서 심장병으로 낙오하여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