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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전집152: 을지문덕

소설『을지문덕』은 1948년 태양신문에 김동인이 연재 집필했던 작품으로 을지문덕 공이 석다산 토굴에 들어가 학문과 무술을 닦으며 고구려를 지켜 명장수로 동방에 천하를 자랑하였으며, 수양제의 이백만 대군을 살수에 함몰시키고 둘러엎은 동방의 수호신 을지문덕에 관한 일생, 살수(薩水)의 전기(戰記), 주변 일화에 대한 짤막한 그의 일대를 소설화한 역사 장편소설입니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의 놀라운 기개와 지혜는 당시 수나라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으며 무려 고구려는 신화통신 보도에 의하면 3백만(?)에 가까운 역사상 최대의 병력이 동원되어 수나라 군을 완전히 궤멸시켰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 유명한 우중문에게 보낸 서한에서 우중문은 을지문덕의 글 솜씨에 감탄하며 기뻐서 자기나라로 돌아갈 작정이었으나, 을지문덕은..
소설『을지문덕』은 1948년 태양신문에 김동인이 연재 집필했던 작품으로 을지문덕 공이 석다산 토굴에 들어가 학문과 무술을 닦으며 고구려를 지켜 명장수로 동방에 천하를 자랑하였으며, 수양제의 이백만 대군을 살수에 함몰시키고 둘러엎은 동방의 수호신 을지문덕에 관한 일생, 살수(薩水)의 전기(戰記), 주변 일화에 대한 짤막한 그의 일대를 소설화한 역사 장편소설입니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의 놀라운 기개와 지혜는 당시 수나라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으며 무려 고구려는 신화통신 보도에 의하면 3백만(?)에 가까운 역사상 최대의 병력이 동원되어 수나라 군을 완전히 궤멸시켰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 유명한 우중문에게 보낸 서한에서 우중문은 을지문덕의 글 솜씨에 감탄하며 기뻐서 자기나라로 돌아갈 작정이었으나, 을지문덕은 강둑을 막아 수나라 군사들을 살수작전에 휘말리게 하여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은 수나라군은 크게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두고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 역사상 대단한 전승기록을 거둔 장군으로 놀라운 기개와 용맹성은 과히 놀랄만하며 시에 나타났듯이 문장력에도 조예가 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완결되진 않았지만, 을지문덕의 주변 흔적을 역사적으로 잠시나마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작품입니다.
김동인 ( 金東仁 1900 ~1951)

본관 전주. 호 금동(琴童) ·금동인(琴童人) ·춘사(春士). 창씨명(創氏名) 곤토 후미히토[金東文仁]. 평남 평양 출생. 일본 도쿄[東京]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졸업,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畵學校]를 중퇴하였다. 1919년 최초의 문학동인지 《창조(創造)》를 발간하는 한편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고 귀국하였으나, 출판법 위반 혐의로 일제에 체포 ·구금되어 4개월 간 투옥되었다. 출옥 후 《목숨》(1921) 《배따라기》(1921) 《감자》(1925) 《광염(狂炎) 소나타》(1929) 등의 단편소설을 통하여 간결하고 현대적인 문체로 문장혁신에 공헌하였다.

이광수(李光洙)의 계몽주의적 경향에 맞서 사실주의적(寫實主義的) 수법을 사용하였으며, 1925년대 유행하던 신경향파(新傾向派) 및 프로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를 표방하고 순수문학 운동을 벌였다. 1924년 첫 창작집 《목숨》을 출판하였고, 1930년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동아일보》에 연재, 1931년 서울 행촌동(杏村洞)으로 이사하여 《결혼식》(1931) 《발가락이 닮았다》(1932) 《광화사(狂畵師)》(1935) 등을 썼다. 1933년에는 《조선일보》에 《운현궁(雲峴宮)의 봄》을 연재하는 한편 학예부장(學藝部長)으로 입사하였으나 얼마 후 사임하였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붉은 산》 《태형》《김연실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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