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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문학선: 여수 (이효석 02)

이효석 | 도디드 | 900원 구매
0 0 272 2 0 16 2016-08-26
셀비안 쇼오는 노래와 춤을 밑천삼아 이곳으로 흘러든 가무단으로 반드시 셀비아 사람들로만 조직된 것이 아니라 십여 명 단원이 백계 노인을 주로 하여 폴란드, 유태, 헝가리, 체코 등 각기 국적을 달리하고 가운데에는 유라시안도 끼어 있는─마치 조그만 인종의 전람회를 이룬 혼잡한 단체였다. 그들의 노래와 춤이 그다지 놀라운 것은 못되었으나 그들의 색다른 자태가 낯설은 곳에서는 사람들의 눈을 끌기에 족했고 우리의 관주가 상당히 비싼 조건으로 그들과 선뜻 계약을 맺은 것도 그 점을 노려서였다. 한 시간 가량씩 하루 두 번씩 출연에 대한 사례가 오백 원, 엿새 동안에 삼천 원이라는 것이 그들을 맞이하는 거의 최고의 대접이었으며 생각컨대 만주 등지에서 일없이 뒹굴던 동호자들이 가..

한국근대문학선: 일표의 공능 (이효석 03)

이효석 | 도디드 | 900원 구매
0 0 286 2 0 16 2016-08-27
낮쯤 해 학교로 전화를 걸고 다짐을 받더니 사퇴하고 집으로 돌아오기가 바쁘게 건도는 자동차를 가지고 왔다. 끌어 앉히다시피 하고는 거리를 내려가 남쪽으로 훨씬 나가더니 뒷골목 한 집으로 다다랐다. 뜰 안의 초목과 조약돌은 저녁물을 뿌린 뒤라 푸르고 깨끗하다. 낯설은 집은 아니었으나 양실만이 있는 줄 알았던 터에 층 아래에 그렇게 조촐한 자시끼를 본 것은 처음이어서 안내를 받아 복도를 고불고불 깊숙이 들어가니 그 한 간의 푸른 자릿방이었다. 또 한 가지 나를 서먹거리게 한 것은 방으로 들어섰을 때 상 건너편에서 방긋 웃음을 띠인 한 송이 색채가 우리를 반기는 것이다. 그 역 낯선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날 저녁의 그 모든 당돌한 배치가 불시에 끌려나온 내게는 도무지 뜻밖의 일이..

한국근대문학선: 황제 (이효석 04)

이효석 | 도디드 | 900원 구매
0 0 276 2 0 16 2016-08-27
잠시 그 집의 문을 빌렸을 뿐 천 칠백육십구 년 팔 월 십 오일―이 날은 세상의 뭇 백성이 영원히 기억해두어야 할 날. 이 마리아 승천절 날 태후 레티싸 나를 탄생하시매 침대 요 위에는 시저와 알렉산더의 초상이 있어 스스로 제왕의 선언을 해주다. 천팔백삼년 오월 십팔일 백성들은 드디어 내 제왕의 몸임을 발견하고 황제로 받들었다. 원로원은 공화제를 폐지하고 전 국민의 뜻 삼백오십칠만 이천삼백이십구표의 투표로써 황제로 추대하매 로마에서는 법왕이 대관식을 거행하러 몸소 파리로 왔고 십이월 이일 튜일러리 왕궁에서 노틀담으로 이르는 시오리 장간의 길을 보병이 늘어서고 일만의 기병이 팔두마차의 전후를 삼엄하게 경계하는 속으로 위풍이 당당하게 거동할 때 연도의 군중은 수백만 은은한 축..

한국근대문학선: 향수 (이효석 05)

이효석 | 도디드 | 900원 구매
0 0 231 2 0 17 2016-08-27
찔레순이 퍼지고 화초 포기가 살아났다고 해도 원체가 고양이 상판만큼밖에 안되는 뜰 안이라 자복히 깔아놓은 조약돌을 가리면 푸른 것 돋아나는 흙이라고는 대체 몇 줌이나 될 것인가. 늦여름에 해바라기가 솟아나고 국화나 우거지면 돌밭까지 가리워 버려 좁은 뜰 안은 오종종하게 더욱 협착해 보인다. 우러러보이는 하늘은 지붕과 판장에 가리워 쪽보만큼 작고 언덕 아래 대동강을 굽어보려면 복도에서 제기를 디디고 서야만 된다. 이 소꿉질 장난감 같은 베이비 하우스에서 집을 다스리고 아이를 돌보고 몸을 건사해야 하는 아내의 처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별수없이 새장안의 신세밖에는 안되어 보이면서 반날을 그래도 밖에서 지울 수 있는 남편의 자리에서 보면 측은히도 여겨진다.

한국근대문학선: 풀잎 (이효석 06)

이효석 | 도디드 | 1,000원 구매
0 0 436 2 0 42 2016-08-27
“세상에 기적이라는 게 있다면 요 며칠 동안의 제 생활의 변화를 두구 한 말 같어요, 이 끔찍한 변화를 기적이라구 밖엔 뭐라구 하겠어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어딘지 먼 하늘에서나 흘러오는 듯 삼라만상과 구별되어 궛속에 스며든다. 준보는 고개를 돌리나 먹같은 어둠 속에서는 그의 표정조차 분간할 수 없다. 얼굴이 달덩어리같이 훤하고 쌍꺼풀진 눈이 포도 알같이 맑은 것은 며칠 동안의 인상으로 그러려니 짐작할 뿐이다. 실과 사귄 지 불과 한 주일이 넘을락 말락 할 때다.

한국근대문학선: 사냥 (이효석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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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609 2 0 50 2016-08-27
연해 두어 번 총소리가 산속에 울렸다. 몰이꾼의 행렬은 산등을 넘고 골짝을 향하여 차차 옴츠러들었다. 발밑에 요란히 울리는 떡갈잎 가랑잎의 어지러운 소리에 산을 싸고 도는 동무들의 고함도 귀 밖에 멀다. 상기된 눈앞에 민출한 자작나무의 허리가 유난스럽게도 희끔희끔 거린다.

한국근대문학선: 만보 (이효석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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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227 2 0 16 2016-08-27
도수장께를 들어오다 만보는 기어코 지게를 벗어 던지고 밭고랑으로 뛰어들어가 허리를 풀었다. 보거나 말거나 태연한 자세로 담배를 집어내 불을 붙였다. 섬은 바소고리의 곱절이 든다. 공복에 두 섬의 거름을 들까지 나르고 나니 해도 어지간히 들었다. 만보는 면에서도 제일가는 장골이다. 장정의 반나절 일을 식전에 해버리는 버릇이었다.

한국근대문학선: 서한 (이효석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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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271 2 0 44 2016-08-27
반장님. 나는 내일이면 이 반을 즉 이 동네를 떠나려는 사람입니다. 다른 구역으로 이사를 가서 다른 반 속에 또 편입되려는 것이오나 웬일인지 애석의 정 없이는 이 반을 떠날 수가 없게 됐습니다. 반에서 해온 여러 가지 행사도 행사려니와 반장님의 가지가지의 자태가 마음속에 새겨져서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웃 사람들과 나눠 온 정리보다는 무엇보다도 영감이 보여준 여러 가지의 심정이 내게는 더 인상깊게 치부되었습니다.

한국근대문학선: 일요일 (이효석 10)

이효석 | 도디드 | 900원 구매
0 0 333 2 0 19 2016-08-27
잡지사에서 부탁 온 지 두 달이 되는 소설 원고를 마지막 기일이 한 주일이나 넘은 그날에야 겨우 끝마쳐 가지고 준보는 집을 나왔다. 칠십 매를 쓰기에 근 열흘이 걸렸다. 그의 집필의 속력으로는 빠른 편도 느린 편도 아니었으나 전날 밤은 자정이 넘도록 책상 앞에 앉았었고, 그날은 새벽부터 오정 때까지 꼽박 원고지와 마주대하고 앉아서야 이루어진 성과였다. 그런 노력의 뒷받침이라 두툼한 원고를 들고 오후는 되어서 집을 나설 때 미상불 만족과 기쁨이 가슴에 넘쳤다. 손수 그것을 가지고 우편국으로 향하게 된 것도 시각을 다투는 편집자의 초려를 생각하는 한편 그런 만족감에서 온 것이었다. 더욱이 그날은 일요일이다. 일요일의 한가한 오후를 거리에서 지내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던 것..

한국근대문학선: 산협 (이효석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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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283 2 0 46 2016-08-27
공재도가 소금을 받아오던 날 마을 사람들은 그의 자랑스럽고 호기로운 모양을 볼 양으로 마을 위 샛길까지들 줄레줄레 올라갔다. 세참 때는 되었을까, 전 놀이가 지난 후의 개나른한 육신을 잠시 쉬고 싶은 생각들도 있었다. 마을이라고는 해도 듬성한 인가가 산허리 군데군데에 헤일 정도로밖에는 들어서지 않은 펑퍼짐한 산골이라 이쪽저쪽의 보리밭과 강낭밭에서 흰 그림자들이 희끗희끗 일어서서는 마을 위로 합의나 한 것 같이 모여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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