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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문학선: 젊은 날의 한구절 (채만식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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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352 2 0 22 2016-09-16
꽃은 좋았어도, 그러나 비바람 많고 노 운하 자욱하여 한갓 개운한 맛이 덜하던 4월의 봄 한철은 어느덧 창경원의 그 번화하고도 어수선스러운 야앵분배와 함께 마지막 다 지나고 시방은 5월…… 씻은 듯 닦은 듯 터분하던 것이 말끔하니 죄다 가시고 나서, 저 커다랗게 머리 위에서 너그러이 홍예(虹霓)를 기울인 정갈한 창공이, 아낌없이 내리는 살진 햇살이, 내리는 햇살을 제물에 날을 삼아 결 보드랍게 대기를 비단짜며 있는 올올의 미풍이, 싱싱한 신록이, 이 모두가 한 가지로 맑고 쇄려만 하여, 계절은 바야흐로 새 정신이 들고 느끼느니 두루 상쾌한 그 5월이던 것이다.

한국근대문학선: 근일 (채만식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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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270 2 0 29 2016-09-16
새벽 다섯시까지(어제 밤 여덟시부터 꼬바기) 앉아서 쓴 것이 장수로 넉장, 실 스물일곱 줄을 얻고 말았다. 그 사이, 노싱을 한 봉 반씩 네 차례에 도합 여섯 봉을 먹었다. 간밤에 새로 뜯어논 스무 개 들이 가가아끼 한 곽이 빈탕이 되었다. 재털이가 손을 못 대게 낭자하다. 성냥 한 곽을 아마 죄다 그었나 보다. 하루 평균 치면 네 개피나 다섯 개피가 배급 표준이라는데, 그러니 조선도 성냥 전표 제도가 생겼다가는 큰 야단이 나겠다.

한국근대문학선: 차중에서 (채만식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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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639 2 0 35 2016-09-17
안해를 데리고 모처럼 고향엘 다니러 내려가는 길이었다. 밤 열한시 이십분의 목포행(木浦行) 직통열차는 다른 간선열차와 마찬가지로 언제고 옆구리가 터지도록 만원 이상인 것이 보통인데, 맨 앞칸인 소치도 있겠지만 그렇더라고 승객이 도리어 모자랄 지경으로, 많이 좌석이 남는 것은 자못 이외가 아닐 수 없었다. 군데군데 그래서 벌써, 이인분의 한 걸상을 혼자 차지하고는 편안히 누워, 일찌감치 잠을 청하는 사람도 있고 하여, 실없이 때아닌 원시(原始)(?)풍경을 구경하겠었다.

한국근대문학선: 병이 낫거든 (채만식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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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304 2 0 34 2016-09-17
성하지 못한 몸이라, 업순이는 가을 새벽의 쌀쌀한 바깥 바람기가 소스라치게 싫어, 연해 어깨와 몸을 옴츠린다. 콜록콜록 기침이 나오고. 가방이, 하찮은 것 같더니(그도 원기가 쇠한 탓이겠지만) 들고 걷기에 무척 힘이 부쳤다. 훤하니 빈 공장 마당엔 이편짝 창고 앞으로, 간밤에 짐을 냈는지 펐는지 미처 쓸지 앉은 채 뽀오얗게 된서리가 앉은 새끼 토막이 낭자히 널려 있다. 그 차가운 서릿발이, 가뜩이나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듯 업순이는 얼른 외면을 한다. 외면하는 눈 바로는 저기만치 나란히 선 쌍굴뚝에서 시꺼먼 연기가 뭉클뭉클 소담스럽게 솟아올라, 불현듯 푸근한 공장 안이 생각힌다.

한국근대문학선: 심봉사 (채만식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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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404 2 0 17 2016-09-17
하늘(天上[천상])도 아니요, 땅(地上[지상])도 아니요 한 회색 허공이었다. 회색 옷을 입고, 회색 살빛을 하고, 회색 표정을 한 늙은 양주가 나란히 앉아 있다. 인간세계의 운명을 맡아보는 신(神) 양주였다. 노구(老嫗)가 커다랗게 하품을 한다. 영감이 따라 커다랗게 하품을 한다. “아이, 심심해!” 노구가 그런다. “어이, 심심해!” 영감이 맞장단을 친다. 노구가 말한다. “무어 구경거리 좀 없나!” “요새는 별로……” “하나 좀 꾸며 보시죠?”

한국근대문학선: 선량하고 싶던 날 (채만식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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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279 2 0 37 2016-09-17
아침 일찍 종업을 하러 나오면서 이렇게 어질고 싶은 명심을 한 것도 오정이 못되어 그만 다 허사가 되고 말았다. 아침의 러시아워가 지났는데도 손님은 너끔하지를 않고 도리어 더 붐비기에 웬일인고 했더니 오늘이 음력 사월 파일이라고. 동대문에서 나가는 차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그대도록 심하지 않은데 들어올 때에는 광나루에서 벌써 만원이다.

한국근대문학선: 역로 (채만식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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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634 2 0 56 2016-09-17
차 떠날 시각을 세 시간이나 앞두고 서울역으로 나온 것이 오후 두시. 차는 다섯시에 부산으로 가는 급행이었다. 차표 사기에 드는 시간은 말고 단지 일렬에 가 늘어서기에만 엉뚱한 시간을 여유 두고 서둘지 아니하면 좀처럼 앉아 갈 좌석의 천신 같은 것은 생의도 못하는 것이 이즈음의 기차여행이었다. 그런데다 본이 사람이 부질없이 다심한 탓에 차 한 번 타는 데도 남처럼 유유히 볼 일 골고루 다 보고 돌아댕기느라고 시간 바싹 임박하여 허둥지둥 정거장으로 달려나가고 기적이 울고 바퀴가 구르기 시작하는 차를 아슬아슬하게 붙잡아 타고는 조금도 아슬아슬해함이 없이 동지섣달에도 땀이나 뻑뻑 씻고 하는 신경 굵은 짓은 감히 부리지 못하는 담보가 되어 가뜩이나 남보다 많은 시간을 낭비하여..

한국근대문학선: 처자 (채만식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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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267 2 0 21 2016-09-17
오후, 강변으로 장작이든 무얼 좀 살까 하고 나갔다가 허행을 하였다. 강에는 많은 뗏목이 내려와 밀렸고, 일변 뜯어 올려다 쌓고 하였다. 강언 덕은 온통 뗏목 뜯어 쌓은 걸로 묻히다시피 하였다. 장작도 마침 큰 배로 두 배나 들어와서 한편으로 푸면서, 한편으로 달구지에다 바리바리 실으면서 하고 있었다. 뱃장작을 도거리로 산 당자인 듯, 자가사리수염에 마고자짜리가 이럭저럭분주히 납뛰고 있어 “장작 좀 살 수 있을까요?”

한국근대문학선: 옥랑사 (채만식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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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234 2 0 3 2016-09-17
마침내 그날로 선용(張[장]先用)은 강보의 불명(不名)을 안아다 아내 서씨에게 부탁한 후 표연히 다시 집을 나가 산으로 들어갔다. 진정 이번은 입산(入山)이었다. 노루재(獐峴[장현]) 산막(山幕)에서 멀지 아니한 백학동의 백련암으로 가, 머리 깎고 혜광(惠光)이라는 법명으로 중이 된 것이었다. 그것이 광무(光武) 4년 경자(庚子) — 서기 1900년…… 선용의 나이 서른한 살 적이었다. 이보다 10년을 앞서 고종(高宗) 28년 신묘(辛卯). 섣달 열나흗날 밤 달이 휘영청 밝고 이윽고 깊은 밤이었다. 과실로, 고기로, 생선으로, 그 밖에 여러 가지 제사장 보기한 것을 멱서리에 넣어 멜빵 걸어 지고 양손에 갈라 들기도 하고 선용은 빠른 걸음을 더욱 급히 하면서 곰의고개(..

한국근대문학선: 도야지 (채만식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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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392 2 0 24 2016-09-17
교내 웅변부(校內雄辯部)의 월례회가 끝나고 나서였다. 회가 끝나자 여럿은 이내 다 흩어져 갔고, 한 6,7인이나가 그대로 처져 있었다. 웅변부를 리드하는, 그리고 나아가서는 교내에서 저희들의 이른바 진보적인 세력을 리드한다는 윤상수, 문태석, 고영달 이런 5,6학년 중심의 맨 말썽꾼이 일파였다. 늘 그들은 이렇게 얼렸다. 웅변부의 집회실로 정하여진 이 5학년 교실에서, 혹은 그들 가운데 누구의 집이나 하숙에서 반드시 약속이나 지정이 있는 것이 아니면서도 저절로 그렇게 얼리곤 하던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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