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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문학선: 생명의 유희 (채만식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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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372 2 0 22 2016-09-14
늦은 봄 첫여름의 지리한 해가 오정이 훨씬 겹도록 K는 자리에 누운 채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그가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하는 대신 아침에 늦잠을 자는 버릇이 있어서 항용 아홉시나 열시 전에는 일어나지를 아니하지만, 그렇다고 오정이 넘도록 잠을 잔 적은 없었다. (하기야 그는 잠을 잔다는 것보다도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만 았았을 따름이다. 보통때라도 누구나 오정이 지나도록 드러누웠으면 시장기가 들 터인데, 하물며 그 안날 아침부터 꼬박 내리 굶은 그가 일찌기 일어나서 밥을 먹을 줄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만일 집안에 돈이 되었든지 쌀이 되었든지 생겨서 밥을 지었으면 알뜰한 그의 어머니가 부랴부랴 나와서 일어나라고 재촉을 하였을 터인데, 도무지 그러한 소식도 없고, 안에서도 ..

한국근대문학선: 산적 (채만식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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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302 2 0 50 2016-09-14
종로 행랑 뒷골 어느 선술집이다. 바깥이 컴컴 어둡고 찬 바람끝이 귀때기를 꼬집어떼는 듯이 추운 대신 술청 안은 불이 환하게 밝고 아늑한 게 뜨스하다. 드나드는 문 앞에서 보면 바로 왼편에 남대문만한 솥을 둘이나 건 아궁이가 있고 그 다음으로 술아범이 재판소의 판사 영감처럼 목로 위에 높직이 앉아 연해 술을 치고 그 옆에 가 조금 사이를 두고 안주장이 벌어져 있다 그러고 그리로 . 돌아서 마방간의 말죽 구유 같은(평평하니까 말죽 구유와는 좀 다를까? 선반, 도마가 있고 그 위에 가 식칼, 간장, 초장, 고추장, 소금 무엇무엇 담긴 주발이 죽 놓여 있다. 안주 굽는 화로는 목로에서 마주보이게 놓여 있다.

한국근대문학선: 그뒤로 (채만식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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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275 2 0 36 2016-09-14
아침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한 P는 같이 모여 점심을 먹던 동지들을 작별하고 M과 같이 종로 네거리로 나섰다. 벌써 세 번째나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P에게는 처음 때와 달라 별로 이 ‘출옥한 때의 특이한 감상’같은 것은 첨예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이번 이 사 년─칠 년이었으나 삼 년은 감형이 되었다 ─사 년이라는 비교적 긴 동안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변천된 경성의 면모가 현저하게 그의 눈에 띄었다.

한국근대문학선: 병조와 영복이 (채만식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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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279 2 0 15 2016-09-14
천정에 바투 매어달린 전등은 방 주인 병조와 한가지로 잠잠히 방안을 밝히고 있다. 대청마루에 걸린 낡은 괘종이 뚝떡 뚝떡 하며 달아나는 시간을 한 초씩 한 초씩 놓치지 않고 세었다. 큰방에서는 돌아올 시간이 아직도 먼 아들을 그대로 기다리고 있는 영복 어머니의 기침소리가 이따금 콜록콜록 들려나왔다. 바로 집 뒤에 약현(藥峴)마루를 내노라고 왕자(王者)답게 차지하고 있는 천주교당에서는 벌떼 소리 같은 찬송가 소리가 울려나왔다. 자정이 지나지 아니하면 그칠 줄을 모르는 경성역의 요란한 기차 소리들은 여전히 어수선하게 야단을 내떨었다. 그러나 병조는 잠잠히 앉아 철필대만 놀렸다.

한국근대문학선: 산동이 (채만식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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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381 2 0 31 2016-09-14
사 년 전. 웬만큼 깊어가는 가을 어느날이었었다. 아침부터 구죽죽하게 내리는 비는 가을날의 싸늘한 기운을 한층 더 도와 추레하고 음산한 기분이 사람사람의 마음을 무단히 심란하고 궁금하게 하였다. 백 년을 살아도 철을 모르는 말초신경 시인들은 구슬픈 리듬을, 외로운 어머니는 멀리 간 아들을, 젊은 과부는 오지 못하는 남편을, 세상살이에 어려운 사람은 살림살이를, 그리고 돈이 있고 일이 없는 늙은 호색한(好色漢)은 젊은 계집의 부드럽고 다스한 살을…… 생각나게 하고 그립게 하는 날씨였었다.

한국근대문학선: 앙탈 (채만식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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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392 2 0 25 2016-09-14
와이샤쓰 소매도 뒤집어서 단추를 끼웠다. 가뜩이나 궁한 그에게 검정 세루 양복이 칼라 와이샤쓰를 짜증이 나도록 땟국을 묻혀 주었다. 어젯밤에 요 밑에 깔고 잔 양복바지는 입고 앉아 조반을 먹느라면 구겨질 것이 맘에 걸리기는 하나 주인 노파가 밥상을 가지고 올 터인데 잠방이 바람으로 문을 열고 받아들일 수는 없으므로 섭섭은 하지만 할 수 없이 집어 입었다. 혁대를 매며 내려다보니 줄은 칼날같이 잡혔으나 좀 비집은 데를 검정실로 얽어맨 자리와 구두에 닿아 닳은 자리에 올발이 톱니같이 내어다보였다. 바짓가랑이로 내려가서는 엄지발톱에 닿아 구멍이 난 언더양말이 남에게 보인다면 몹시 창피할 만큼 숭업게 발톱이 내어다보였다.

한국근대문학선: 창백한 얼굴들 (채만식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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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399 2 0 37 2016-09-14
웅성거리는 소리에 엷이 든 늦잠이 깬 K는 머리맡 재털이에서 담배토막을 집어 피웠다. 틉틉한 입안에 비로소 입맛이 든다. 창에는 맑은 햇빛이 가득 쪼인다. 파르스름한 연기가 천정으로 기어 올라 간다. K의 머리속에는 어젯밤 살롱 아리랑의 광경이 술취한 사람의 발길같이 돌아간다. 세상이 갑자기 놀란 듯이 뚜 오정 부는 소리가 들리며 뭇 싸이렌이 뒤미처 따라 분다.

한국근대문학선: 화물자동차 (채만식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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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279 2 0 44 2016-09-14
조선에서 쌀이 많이 나기로 인천과 겨루는 K항구에 자본금 십이만 원의 주식회사로 된 S자동차부가 생기었다. 생기면서 맨처음으로 끔찍한 일을 시작하였으니 K정거장을 출발점으로 한 시내 이십 전 균일 택시의 경영이다. 영업 성적은 백이십% 만점. 그뿐 아니라 K를 중심으로 부근 각지에 통하는 자동차 선로는 기득권은 매수나 경쟁으로 없는 곳은 새로운 선로 개척으로 거의 전부가 S자동차부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한국근대문학선: 농민의 회계보고 (채만식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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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391 2 0 36 2016-09-14
병문이가 나를 찾아 서울로 온 것이 바로 지난 오월 그믐이다. 눈과 신경과 그리고 사지가 노그라지게 지친 몸으로 회사 ― 인쇄소의 옆문을 무심코 열어 동무들의 틈에 끼여 나오느라니까 “학순이!” 하고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한 전라도 악센트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하고 휘휘 둘러보는데 저편 담 밑에 섰던 웬 헙수룩한 시골사람이 나를 보고 반기며 쫓아온다. 나는 정말 병문이를 선뜻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쫓아와서 내 팔을 두 손으로 덥석 붙잡고(그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한국근대문학선: 팔려간 몸 (채만식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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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267 2 0 36 2016-09-15
동산 마루에서 시뻘건 해가 두렷이 솟아오른다. 들 위로 얕게 덮인 아침 안개가 소리없이 사라지고 누른 볏목들이 일제히 읍을 한다. 약오른 풀 끝에 맺은 잔이슬들이 분주히 반짝거린다. 꼴을 먹는 소 목에서는 끊이지 않고 요령이 흔들린다. 쇠고삐를 잡고 앉아 명상에 잠겼던 견우는 걷어올린 맨 다리를 “딱.” 때리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쇠파리가 침을 준 것이다. “아니 오나?” 견우는 혼자 중얼거리면 동리 앞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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