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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 일일 (한국문학전집: 계용묵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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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220 2 0 1 2016-12-29
정릉의 산 속은 새소리 없이도 푸르다. 물소리만이 그저 솨아솨 골짜기마다 들릴 뿐인데 산은 푸르렀다. 새소리를 무시하고도 정기만으로 푸르른 그 기개만은 장하다 아니 할 수 없으나 적어도 이만한 녹음이라면 꾀꼬리 소리 한마디 들을 수 없음이 무색하구나. 내 본래 산이나 바다의 취미를 모르거니와 오늘 내가 정릉의 녹음을 찾게 된 것도 무슨 이런 녹음의 유혹에서가 아니요, 사우(社友)들의 종용에 마지못해 따라 나섰던 길이니 그까짓 녹음이야 짙었던, 말았던 꾀꼬리야 울던, 마던 어아(於我)에 하관(下關)이리오만 그래도 이 녹음에, 이 물소리라면 꾀꼬리 소리 한마디쯤은 있어야 면목이 설 것 아닌가. 어쩌다 오다가다 숲 속을 다녀가는 밀화부리 소리 한마디 들을 수 없다.

피서의 성격 (한국문학전집: 계용묵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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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194 2 0 1 2016-12-29
그 어느 해 여름 피서를 한다고 이삼 인의 벗으로 어울려 옥호동(玉壺洞) 약수(藥水)를 찾아갔던 일이 있다. 산촌의 약수치고는 설비나 경치나가 다 무던했다. 이 약수의 성능이 어떠한 것인지는 알 바 없었으나 물이 차기로는 빙수에 질 바가 없었다. 돌 틈 새로 용솟음쳐 흐르는 물을 배지로 받으면 물 위에 보얗게 어리는 안개가 보기만 하여도 땀방울이 가더든다. 게다가 심산 깊숙이서 시잉싱 줄기차게 숲 사이를 헤치고 쏟아져 내려오는 산바람이 끊임없이 몸을 어루만져 주어 셔츠 바람엔 한기까지 느낄 정도다. 다만 피서지로 결점인 것은 쭉 벌거벗고 진탕치듯 헤엄을 쳐 볼 그러한 물만이 없는 것뿐이지 시원하고 조용한 편으로 송도원(松濤園)이나 그런 것보다 오히려 좋을는지 몰랐다.

수박 (한국문학전집: 계용묵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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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972 2 0 1 2016-12-30
취미에 따라서 제각기 다르기는 할 것이로되 여름 과실로는 아무래도 수박이 왕좌(王座)를 차지해야 할 것이다. 맛으로 친다 해도 수박이 참외나 다른 그 어떤 과실에 질 배 없겠으나 그 생긴 품위로 해서라도 참외나 그런 그 어떤 다른 과실이 수박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그 중후한 몸집에 대모(玳瑁)무늬의 엄숙하고 점잖은 빛깔이 우선 교양과 덕을 높이 쌓은 차림새 같은 그러한 고상한 인상을 주거니와, 감미한 맛을 새빨갛게 가득히 지닌 그 속심은 이 교양과 덕의 상징이라 아니 볼 수 없다.

전승지 (한국문학전집: 계용묵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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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190 2 0 1 2016-12-30
파리와 싸운다. 밥상을 들여다 놓으면 뚜껑을 열기가 바쁘게 달려들어 먼저 맛을 보며 돌아가는 놈이 파리다. 불결한 배설을 정한 데 없이 아무 데나 되는대로 갈겨 내는 놈이 또 파리다. 그러나 이런 것들쯤은 그대도 괜찮다. 책을 들고 누운 얼굴 위에 날아 들어 자꾸만 피부를 간질이며 방해를 하는 때처럼 미운 것은 없다. 시인 하이네는 바로 죽기 직전에 사랑하는 애인을 가리켜 “나의 파리여!”하고 불렀다거니와, 병석에 누운 자기의 주위를 떠나지 않고 언제나 빙잉빙 돌아가는 것이 마치 파리와 같아서 그렇게 불렀는지 어쨌든 애인을 파리라고 불렀다니 이 시인은 파리가 그처럼 좋았을까. 파리일레 책과의 친밀히 알뜰히 이어지지 못하고 모처럼 가라앉혀 책속에 파묻힌 정신..

여름의 미각 (한국문학전집: 계용묵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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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231 2 0 1 2016-12-30
여름은 채소를 먹을 수 있어 좋다. 시금치, 쑥갓, 쌈, 얼마나 미각을 돋우는 대상인가. 새파란 기름이 튀여지게 살진 싱싱한 이파리를 마늘장에 꾹 찍어 아구아구 씹는 맛 더욱이 그것이 찬밥일 때에는 더할 수 없는 진미가 혀끝에 일층 돋운다. 그러나 같은 쌈, 같은 쑥갓이로되, 서울의 그것은 흐뭇이 마음을 당기는 것이 아니다. 팔기 위하여 다량으로 뜯어다 쌓고 며칠씩이나 묵혀 가며 시들음 방지(防止)로 물을 뿌려선 그 빛을 낸다. 여기 미각이 동할 리 없다.

조어찬 (한국문학전집: 계용묵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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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295 2 0 1 2016-12-30
나는 낚시질를 좋아한다. 지금도 내가 만일 고향에 있는 몸이라면 이 글을 쓰는 이 시간이 바로 송가포반(宋哥浦畔)의 그 소위 ‘섬배미뚝’이라는 갈밭 속 회돌아진 모롱고지의 애기버들 밑에 한가히 풀방석을 깔고 앉아 바람 좇아 굽이치는 물결 위에 자리를 못 잡는 낚시 깃의 동정에서 고깃쩔을 찾아 내려고 온 정신을 시선에 모으고 있을 그러한 시간에 틀림없을 게다. 한여름의 한낮 볕이 지글지글 내려 눌러, 개구리조차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죽은 듯이 두 다리를 쭉 뻐드러지고 물 위에 두웅둥 떠도는 그러한 더위인데도 이때만은 더운 줄을 모른다.

수상록 (한국문학전집: 계용묵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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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208 2 0 1 2016-12-29
사람이 세상에 날 때에 일생의 필자를 그 얼굴에다 내여 박고 나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대개 그 사람의 팔자가 그 얼굴에 그려 있는 듯이 보이기는 한다. 붙음 붙음이 괴롭게 정리되고, 번듯하게 생긴 얼굴의 소유자는 그것이 그대로 그 사람의 복을 말하는 것 같고, 또 그와는 반대로 얼굴이 조밀작해서 어딘지 구차해 보이는 얼굴의 소유자는 아무리 해도 복은 없을 것 같게만 보인다.

율정기 (한국문학전집: 계용묵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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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328 2 0 1 2016-12-29
인제 버들잎이 완전히 푸르른 걸 보니 밤나무 잎에도 살이 한참 오르고 있을 것 같다. 버들 뒤에 잎이 푸르른 나무가 하필 밤나무뿐이랴만 버들잎이 푸르면 나는 내 고향집 정원의 그 늙은 밤나무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그것은 몇 백 년이나 되었는지 팔순의 노인네들까지 자기의 어렸을 시절에도 역시 그저 지금이나 다름없는 모양으로 그렇더라고 하는, 언제 어느 때에 심어졌는지 그 유래조차 알 수 없는 그러한 연령을 가진 밤나무다. 어떠한 나무든지 아름드리로 굵게 되면 그 보이는 품이 사람으로 비해 보면 많은 수양에 단련이 된 그러한 학자같이 침착하고 장중한 맛이 있어 보이거니와, 이 밤나무야말로 사상이 일관된 철학자같이 숭엄하게, 무겁게, 그리고 거룩하게 보였다.

고독 (한국문학전집: 계용묵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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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211 2 0 1 2016-12-27
작가 생활에 있어 여행이 지극히 필요한 줄은 알면서도 나는 여행에 취미를 그토록 느끼지 못한다. 그리하여 특수한 사정으로서가 아닌 한에선 우금(于今)껏 여행을 위한 여행이란 단 한 번도 가져 본 일이 없다. 고독이 찰지게 두고 스며들 때에는 여행이라도 하여 보면, 시원할 듯이 문득 생각은 되면서도 차마 그것을 실행하여 그 찰지게 파고드는 고독을 아주 잊고 싶지는 않다. 고독이란 그 무슨 진리를 담은 껍데기 같게도 생각이 되면서 나를 버리지 않고 따르는 그 고독이 차라리 반갑게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원자탄 (한국문학전집: 계용묵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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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238 2 0 1 2016-12-27
무어라고 따집을 수 없는 허전한 마음이 나를 늘 헌책전으로 끌어낸다. 이 마음의 요구엔 아무리 친한 벗도 응할 자격이 없고, 아무리 맛나는 음식, 아무리 재미나는 오락도 인연이 멀었다. 먼지 앉고, 곰팡내 나는 그 어느 책 속에서 활자를 셈으로만이 그저 요구의 대상일 것 같아, 벗에서나, 음식에서나, 오락에서나 마찬가지로 역시 속아는 오면서도, 그래도 제일 신용이 있음직해서, 속아도 속아도 나는 이 헌책전의 유혹에만은 벗어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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