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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작가와 톨스토이 (한국문학전집: 김동인 12)

余[여]가 톨스토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안 것은 십 삼사 세 때이다. 그때 여의 長兄[장형] 東元[동원]이 某[모] 사건에 걸려서 尹致昊[윤치호] 씨 등과 영어의 몸이 되었을 때에 톨스토이 작 「부활」이라는 책자를 차입하여 달라는 편지 때문에 그 책을 구하러 다니느라고 톨스토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였던 것이다. 그때는 여는 기독신자의 집안의 도령으로 있었더니만치 ‘부활’이라 하면 ‘예수의 부활’로밖에는 생각을 못하던 시절이다.
余[여]가 톨스토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안 것은 십 삼사 세 때이다. 그때 여의 長兄[장형] 東元[동원]이 某[모] 사건에 걸려서 尹致昊[윤치호] 씨 등과 영어의 몸이 되었을 때에 톨스토이 작 「부활」이라는 책자를 차입하여 달라는 편지 때문에 그 책을 구하러 다니느라고 톨스토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였던 것이다. 그때는 여는 기독신자의 집안의 도령으로 있었더니만치 ‘부활’이라 하면 ‘예수의 부활’로밖에는 생각을 못하던 시절이다.
김동인(金東仁, 일본식 이름: 東 文仁 히가시 후미히토 / 金東文仁 가네히가시 후미히토, 1900년 10월 2일 ~ 1951년 1월 5일)은 일제 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대한민국의 소설가, 문학평론가, 시인, 언론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금동(琴童), 금동인(琴童仁), 춘사(春士), 만덕(萬德), 시어딤이다.

1919년의 2.8 독립 선언과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소설,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였고,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친일 전향 의혹이 있다. 해방 후에는 이광수를 제명하려는 문단과 갈등을 빚다가 1946년 우파 문인들을 규합하여 전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하였다. 생애 후반에는 불면증, 우울증, 중풍 등에 시달리다가 한국 전쟁 중 죽었다.

평론과 풍자에 능하였으며 한때 문인은 글만 써야된다는 신념을 갖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부터 나타난 자유 연애와 여성 해방 운동을 반대, 비판하기도 하였다. 현대적인 문체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꼽힌다. 필명은 김만덕, 시어딤, 김시어딤, 금동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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