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와 소식을 전하는 말에, 오사카(大阪)에서는 조선 사람에 대한 괄세가 대단한데 그것은 십중팔구가 스스로 신용을 잃은 까닭이요(이하 2행략), 또 가로되 연락선 승객의 3분의 2는 조선 노동자들인데, 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왔다가는 또 가고, 가기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갔다가는 또한 돌아오곤 하여, 전토(田土) 팔아 통틀어 만든 노비(路費)도 연락선에서 없어지고, 노동하여 한푼 두푼 주워 모은 임금도 현해탄에서 발산(發散)하고 마는 형편인데, 그래도 어제와 오늘이 일반이요, 작년과 금년이 다름이 없이 가는 배에도 3분의 2는 흰옷이요, 오는 배에도 대다수는 굶주린 사람이니 한심스럽더라고 딱한 일이다.
순수한 ‘조선산 그리스도교’를 수립하고 교회에 매달린 교조적 신앙이 아닌 조선민족의 그리스도교를 뿌리내리는 무교회주의 신앙을 주장했다. 그의 신앙은 개인적 구제의 차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조선인 그리스도교도로서 시대의식을 명확히 지니고 조선민족의 구제와 조국 독립에까지 확대되었다. 일본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다니던 중, 동양선교회 성서학원 학생의 노방전도를 통해 그리스도교를 접했다. 일본 무교회운동을 창시한 우치무라 간조를 만나 성서연구회 일원이 되면서 신앙적 토대를 쌓아 갔다. 1927년 귀국, 교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민족주의적 교육을 일관했다. 월간 종교잡지 <성서조선>을 발행하고 1930년 6월부터 가정집회 형식으로 약 10년간 성서연구회를 주도했다. 창씨개명,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동포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참된 정신과 독립정신을 계몽하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1945년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