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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발의 가부 (한국문학전집: 김교신 03)

아마 칼라일 선생의 위인 평론에 있었던가 한다. 마호메트라는 인간은 노발한 즉 이마에 핏줄이 일어섰는데 이렇게 노발하는 것이 그 진실성의 소치라고. 저에게 아무 취할 것이 없다할지라도 이렇게 핏줄 일으키기까지 노발하는 그 진실성만은 시인하여줄 것이라는 뜻이었던 듯하다. 마호메트의 위대는 가지지 못했으나 저의 노발만은 근사하게 천품으로 타고난 인간이 이런 소식을 들은 후로 일부러 노발하려고 힘쓰기까지는 못했으나 자기의 조급한 천성을 스스로 변호하기에는 다대한 힘을 저 위인 마씨에게서 차용한 일도 비일비애이었던 것은 차라리 동정할 만한 사실이었다.
아마 칼라일 선생의 위인 평론에 있었던가 한다. 마호메트라는 인간은 노발한 즉 이마에 핏줄이 일어섰는데 이렇게 노발하는 것이 그 진실성의 소치라고. 저에게 아무 취할 것이 없다할지라도 이렇게 핏줄 일으키기까지 노발하는 그 진실성만은 시인하여줄 것이라는 뜻이었던 듯하다.

마호메트의 위대는 가지지 못했으나 저의 노발만은 근사하게 천품으로 타고난 인간이 이런 소식을 들은 후로 일부러 노발하려고 힘쓰기까지는 못했으나 자기의 조급한 천성을 스스로 변호하기에는 다대한 힘을 저 위인 마씨에게서 차용한 일도 비일비애이었던 것은 차라리 동정할 만한 사실이었다.
순수한 ‘조선산 그리스도교’를 수립하고 교회에 매달린 교조적 신앙이 아닌 조선민족의 그리스도교를 뿌리내리는 무교회주의 신앙을 주장했다. 그의 신앙은 개인적 구제의 차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조선인 그리스도교도로서 시대의식을 명확히 지니고 조선민족의 구제와 조국 독립에까지 확대되었다. 일본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다니던 중, 동양선교회 성서학원 학생의 노방전도를 통해 그리스도교를 접했다. 일본 무교회운동을 창시한 우치무라 간조를 만나 성서연구회 일원이 되면서 신앙적 토대를 쌓아 갔다. 1927년 귀국, 교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민족주의적 교육을 일관했다. 월간 종교잡지 <성서조선>을 발행하고 1930년 6월부터 가정집회 형식으로 약 10년간 성서연구회를 주도했다. 창씨개명,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동포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참된 정신과 독립정신을 계몽하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1945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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