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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원 (한국문학전집 466)

윤기정 | 도디드 | 500원 구매
0 0 793 2 0 69 2016-08-01
봄이다. 고양이가 양지쪽에서 연해 하품을 하고 늙은이 볕발을 쫓아다니며 허리춤을 훔척거리면서 이 (蝨)사냥을 골몰히 하는 때가 닥쳐왔다. 젊은이들은 공연히 사지가 느른하고 마음이 까닭없이 군성거리는 시절이 찾아왔다. 밖에서는 마치 겨우내 꽝꽝 얼어 붙었던 시냇물이 확- 풀려가지고 콸콸거리며 소리쳐 흐르듯이 뭇사람들의 와글와글하고 떠드는 소리, 몹시 시끄러운데 쨍쨍한 볕이 우유빛 유리창을 들이비쳐 진찰실 안은 유난히 밝다. 이 안에서 삼십이 될락 말락한 젊은 의사 P가 하루 진종일 눈, 코 뜰 새없이 병자들한테 시달리고 나면 저녁때에는 마치 졸경을 치고난 사람처럼 머리가 핑핑 돌아가고 사지가 솜피듯 피는 것 같다. ‘이래서야 사람이 살 수가 있나. 돈도 소중하지만…’ 세..

차부 (한국문학전집 467)

윤기정 | 도디드 | 500원 구매
0 0 375 2 0 64 2016-08-01
갓난이 아버지는 해 저물 무렵에야 점심겸 저녁겸 얼러서 막걸리 한사발에다 국 한 그릇을 받아먹은 것이 시장해 그랬던지 머리가 띵하고 눈이 개개 풀리기 시작해 전신이 착 까부러지고 꼬박꼬박 졸려옴을 견디다 못해서 한칸이라고 해도 넓은 반 칸통밖에 안되는 움파리같은 벽문방 한 귀퉁이에 쓰러져 세상모르고 새우등 잠을 자다가 “인력거!” 하고 부르는 바람에 곤하게 들었던 잠을 소스라쳐 깨었다. 허나 자기 차례는 아니라고 스스로 짐작하였다. 곁에 누웠던 춘보는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네!” 하고 방문을 왈칵 열며 밖으로 나갔다. 갓난아버지도 겉묻어 일어나 눈을 손등으로 비비고 한편 구석 벽에 오도카니 걸려있는 군데군데 찌그러지고 녹이 슬고 벗겨지고 게..

복덕방 (한국문학전집 426)

이태준 | 도디드 | 900원 구매
0 0 621 2 0 163 2016-07-28
"녹두 빈자떡을 부치는 게로군, 흥……." 한 오륙 년째 안초시는 말끝마다 '젠―장……'이 아니면 '흥!' 하는 코웃음을 잘 붙이었다. "추석이 벌써 낼 모레지! 젠―장……." 안초시는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었다. 기름내가 코에 풍기는 듯 대뜸 입 안에 침이 흥건해지고 전에 괜찮게 지낼 때, 충치니 풍치니 하던 것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아래윗니가 송곳 끝같이 날카로워짐을 느끼었다. 안초시는 그 날카로워진 이를 빈 입인 채 빠드득 소리가 나게 한번 물어 보고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천리같이 트였는데 조각구름들이 여기저기 널리었다. 어떤 구름은 깨끗이 바래 말린 옥양목처럼 흰빛이 눈이 부시다. 안초시는 이내 자기의 때 묻은 적삼 생각이 났다. 소매..

아내의 자는 얼굴 (한국문학전집 427)

최서해 | 도디드 | 500원 구매
0 0 314 2 0 64 2016-07-28
아내의 자는 얼굴 _최서해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으니 추워질 일이다. 더울 때가 되면 덥고 추울 때가 되면 추워지는 것은 자연의 힘이다. 자연의 힘을 누가 막으며 무어라 칭원하랴? 하지만 자연의 그 힘에 대항할 만한 무기가 없는 사람들의 입에서 칭원이 안 나올 수 없는 일이다.’ ‘추워지니 그것을 대항하려면 불이 필요하다. 나뭇바리나 단단히 장만해야 될 것이다. 그것은 방을 데우는 데 필요하지만 찬 눈과 쓰린 바람을 무릅쓰고 거리에 나다니려면 의복도 빠지지 못할 요구 조건의 하나이다. 자켓이나 외투 같은 것은 너무도 고상한 것이니 바라볼 생념도 없지만 튼튼한 무명옷에 솜이나 툭툭히 놓아 입어야 얼어 죽은 귀신을 면할 일이다. ..

패강냉 (한국문학전집 428)

이태준 | 도디드 | 900원 구매
0 0 383 2 0 59 2016-07-28
다락에는 제일강산(第一江山)이라, 부벽루(浮碧樓)라, 빛 낡은 편액(扁額)들이 걸려 있을 뿐, 새 한 마리 앉아 있지 않았다. 고요한 그 속을 들어서기가 그림이나 찢는 것 같아 현(玄)은 축대 아래로만 어정거리며 다락을 우러러본다. 질퍽하게 굵은 기둥들, 힘 내닫는 대로 밀어던진 첨차와 촛가지의 깎음새들, 이조(李朝)의 문물(文物)다운 우직한 순정이 군데군데서 구수하게 풍겨 나온다. 다락에 비겨 대동강은 너무나 차다. 물이 아니라 유리 같은 것이 부벽루에서도 한 뼘처럼 들여다보인다. 푸르기는 하면서도 마름〔水草〕의 포기포기 흐늘거리는 것, 조약돌 사이사이가 미꾸리라도 한 마리 엎디었기만 하면 숨 쉬는 것까지 보일 듯싶다. 물은 흐르나 소리도 없다. 수도국 다리를..

푸른 하늘 (한국문학전집 429)

백신애 | 도디드 | 900원 구매
0 0 293 2 0 47 2016-07-28
부산에서 경성으로 가고 오는 기차선로 이름은 경부선이라 하지요. 이 경부선 기차를 타고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구 정거장에서 내려가지고 동쪽으로 나가는 조그마한 기차에 갈아타면 동쪽 바닷가 포항이라는 곳까지 갈 수 있어요. 그리고 경주라고 하는 아주 예전에 신라 임금이 사시던 곳에도 갑니다. 그런데 이 기차선로 이름은 동해중부선이라고 한답니다. 대구서 이 기차를 타고 나면 다음 닿는 곳은 동촌이라는 정거장이고요, 그 다음은 어여쁜 이름을 가진 반야월이라는 정거장입니다. 이제 여러분께 하려는 이야기가 바로 이 반야월 정거장 근처에서 시작됩니다. 여러분이 이 이야기를 다 읽으시고 나서 일부러 만들어 쓴 거짓말 이야기겠지 하고 의심은 하지 마세요. 왜 그러냐 하면..

토혈 (한국문학전집 430)

최서해 | 도디드 | 900원 구매
0 0 309 2 0 45 2016-07-28
이월의 북국에는 아직 봄빛이 오지 않았다. 오늘도 눈이 오려는지 회색 구름은 온 하늘에 그득하였다. 워질령을 스쳐오는 바람은 몹시 차다. 벌써 날이 기울었다. 나는 가까스로 가지고 온 나뭇짐을 진 채로 마루 앞에 펄썩 주저앉았다. 뼈가 저리도록 찬 일기건마는 이마에서 구슬땀이 흐르고 전신은 후끈후끈하다. 이제는 집에 다 왔거니 한즉 나뭇짐 벗을 용기도 나지 않는다. 나는 여태까지 곱게 먹고 곱게 자랐다. 정신상으로는 다소의 고통을 받았다 하더라도 육체의 괴로운 동작은 못 하였다. 그런데 나는 형제도 없고 자매도 없다. 아버지는 내가 아직 강보에 있을 때에 멀리 해외로 가신 것이 우금(于今) 소식이 없다. 그러니 나는 이때까지 어머니 덕으로 길리었다. 어머니..

아내 (한국문학전집 431)

이무영 | 도디드 | 900원 구매
0 0 266 2 0 44 2016-07-28
"그래, 어떻게 됐수? 오늘은 뭬랍디까?" 대문턱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불도 못 땐 냉방에서 화롯전을 끼고 새우잠을 자던 인숙이가 뛰어나와서 이렇게 물을 것을 생각하자 그의 발은 가끔 가다가 우뚝우뚝 멈춰졌다. 날씨는 춥다 못해서 매웠다. 한시를 지난 종로통에는 인적조차 끊겼다. 가끔 쟁반만한 두 눈을 부라리며 기생을 실은 자동차가 기가 나서 거리를 질주할 뿐이다. 상점 문도 다 닫힌 밤의 서울에서 파란불을 켠 카페만이 아가리를 딱 벌리고 지나가는 사람을 집어삼킨다. 그러나 충노만은 동대문 통에서 종로 앞까지 오도록 한 곳도 부르는 집이 없었다. 하얀 에이프런 속에 손을 감춘 여급들이 빼꼼 빼꼼 내어다보고는 깰깰거리기만 한다. 그의 주머니 속은 동전 서 푼만이 짤..

바다의 전설 (한국문학전집 432)

차상찬 | 도디드 | 500원 구매
0 0 268 2 0 26 2016-07-28
우리나라에서도 남쪽 바다 ─ 천리만리 망망한 연파(烟波) 속에 외로이 자리 잡고 있는 섬나라 제주도(濟州道)에는 옛날부터 해녀(海女)가 있기로 유명한 곳이다. 모슬포(摹瑟浦)라는 포구에 사는 고옥랑(高玉娘)이라는 해녀가 어떤 따뜻한 봄날 전복을 따려고 나무잎 같은 쪽배를 저어 제주도의 남쪽 바다에 멀리 떨어져 있는 마라도(摩羅島)란 섬으로 갔었다. 이허도(島)러라 이허도러라 이허이허 이허도러라 이허도가면 나눈물난다 이허말은 마러저가라 서룬 어머니 날배힐적에 어느 바다의 메억을 먹어 바람일적 절(波)일적마다 구을리며 못사라서라 영해(瀛海)바다 가없은 바다 어느 날 온갖이라살이 바닷가의 봄빛을 사랑하는 고옥..

들메 (한국문학전집 433)

이무영 | 도디드 | 500원 구매
0 0 313 2 0 60 2016-07-29
갓 둘레가 깔쪽깔쪽한 오십전짜리 은전 한 푼이 나의 총재산이었다. 이 오십전으로 서울까지의 삼백리 길 노자를 해야 했고, 이 오십전으로 백사지 땅이나 진배없는 서울에서 고학을 해야 했다. 아무리 물가가 싼 시절이라 하지마는 정말 터무니없는 공상이었다. 열세 살 때 일이다. 그때만 해도 집에서는 얼마간의 학비쯤은 보태어줄 수도 있는 형편이기도 했었다. 두 섬지기의 광작이었고 남한테 내어준 땅섬지기로 텃도지 들어오는 것도 약간 있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이 보조도 바랄 수 없이 일을 저지르고 집을 떠났었다. 서울공부 가는 것을 방해하는 형을 재떨이로 때리어 머리를 터뜨렸던 것이다. 아버지한테 붙들리기만, 하면 반은 죽는 판이다. 그날 밤을 메밀묵 장사 하는 복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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