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무산계급운동이 1927년을 과정하여 오는 동안에 일찍이 보지 못하던 격렬한 이론투쟁으로 일관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부인치 못할 사실이다.
문예운동진영 내에 있어서 이와 같은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격렬한 이론투쟁은 이론확립을 위하여 감행되었고 이론확립은 전체성적 운동을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문예운동으로서의 과거 일 년간 이론투쟁을 계속한 이유가 있고 또한 역사적 의의가 존재한 것이다.
나는 이 아래에 1927년인 과거 일 년간 이론투쟁이 얼마나 격렬하였었다는 것을 반증하기 위하여 논전한 것을 간단히 지적하여 보겠다.
일제 강점기에 주로 활동한 소설가 겸 평론가, 영화제작자이다. 호는 효봉(曉峰)이며, 효봉산인(曉峰山人)이라는 필명도 사용했다.
한성부 출신으로 보인학교에서 수학했다. 이 학교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해산된 군인들이 집결한 보인학회가 1908년에 설립한 애국계몽 계열의 사립 학교이다. 보인학교에 재학하면서 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고, 임화와도 교유하였다.
10대 때부터 소설 습작을 시작하여, 1921년에 《조선일보》에 〈성탄의 추억〉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1922년에는 염군사에 가담하고 1924년에 서울청년회 소속으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창립을 주도했다. 카프 중앙위원과 서기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