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새 안녕하시며 어린애들도 학교에 잘 다니며 원고 많이 쓰셨습니까.
저는 어제야 겨우 볼 일을 대강 마치고서 오늘 아침 9시발 승합 자동차를 타고 서울을 떠나 이곳으로 다시 왔습니다.
종로에서 ×군을 만났지요. 그리하여 얼마 전부터 우리들 사이에 숙제로 내려 오던 웅어잡이 뱃놀이를 즉시 실행해 보자고, 엄군과 송군과 형과 제가 그날 노상에서 헤어질 때 상의한 후 제게 부탁한 말을 전하였지요.
그랬더니 ×군의 말이 여기서도 강까지 가려면 20리나 실히 되니 이리로 모이느니보다 바로 경성역에서 기차를 타고 수색 가서 내리면 한오리 가량되니 일자와 시간만 작정해 가지고 수색서 만나자고 하더군요. 제 생각에도 그렇게 하는 편이 차비도 덜 들 뿐 아니라 걸음도 덜 걷겠기에 날자는 오는 일요일 말고 그 다음 일요일로 정하였고 시간은 경의선 첫차를 타기로 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주로 활동한 소설가 겸 평론가, 영화제작자이다. 호는 효봉(曉峰)이며, 효봉산인(曉峰山人)이라는 필명도 사용했다.
한성부 출신으로 보인학교에서 수학했다. 이 학교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해산된 군인들이 집결한 보인학회가 1908년에 설립한 애국계몽 계열의 사립 학교이다. 보인학교에 재학하면서 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고, 임화와도 교유하였다.
10대 때부터 소설 습작을 시작하여, 1921년에 《조선일보》에 〈성탄의 추억〉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1922년에는 염군사에 가담하고 1924년에 서울청년회 소속으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창립을 주도했다. 카프 중앙위원과 서기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