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의 고통 이제 “ 그 고통을 잊고 현실을 떠나심에 어느 누가 감히 隕石 [운석]이 땅에 파묻히겠다고만 하겠는가. 혜성처럼 빛나든 그 휘황한 광채! 길이길이 빛이리니 당장 숨을 쉬고 있는 인류의 한사람이요 문학에 뜻 둔 한사람으로서 그 위대한 업적 문학자로서의 거룩한 일생을 우러러보매 어찌 머리가 제절로 수그려지지 않겠습니까.
이미 발한 빛도 감사하지만, 이제 다시 더 빛내지 못하고 사라지심에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시지 않고 오직 한길로만 돌진하여 쌓고 쌓아놓은 거룩한 문학적 업적만을 돌이켜보면서 그윽하고 정성된 마음으로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내가 이러한 조문을 참으로 경건한 마음에서 우러나와 쓴 지 어언간 일년이 지냈다.
일제 강점기에 주로 활동한 소설가 겸 평론가, 영화제작자이다. 호는 효봉(曉峰)이며, 효봉산인(曉峰山人)이라는 필명도 사용했다.
한성부 출신으로 보인학교에서 수학했다. 이 학교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해산된 군인들이 집결한 보인학회가 1908년에 설립한 애국계몽 계열의 사립 학교이다. 보인학교에 재학하면서 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고, 임화와도 교유하였다.
10대 때부터 소설 습작을 시작하여, 1921년에 《조선일보》에 〈성탄의 추억〉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1922년에는 염군사에 가담하고 1924년에 서울청년회 소속으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창립을 주도했다. 카프 중앙위원과 서기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