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1772

2020 한국근대문학선: 산

이효석 | 도디드 | 500원 구매
0 0 273 3 0 26 2020-04-10
나무하던 손을 쉬고 중실은 발 밑의 깨금나무 포기를 들쳤다. 지천으로 떨어지는 깨금알이 손안에 오르르 들었다. 익을 대로 익은 제철의 열매가 어금니 사이에서 오도독 두 쪽으로 갈라졌다. 돌을 집어던지면 깨금알같이 오도독 깨어질 듯한 맑은 하늘, 물고기 등같이 푸르다. 높게 뜬 조각구름 때가 해변에 뿌려진 조개껍질같이 유난스럽게도 한편에 옹졸봉졸 몰려들 있다. 높은 산등이라 하늘이 가까우련만 마을에서 볼 때와 일반으로 멀다. 구만 리일까 십만 리일까. 골짜기에서의 생각으로는 산기슭에만 오르면 만져질 듯하던 것이 산허리에 나서면 단번에 구만 리를 내빼는 가을 하늘. 산 속의 아침나절은 졸고 있는 짐승같이 막막은 하나 숨결이 은근하다. 휘엿한 산등은 누워 있는 황..

2020 한국근대문학선: 들

이효석 | 도디드 | 1,000원 구매
0 0 262 3 0 7 2020-04-10
꽃다지, 길경이, 나생이, 딸장이, 먼둘네, 솔구장이, 쇠민장이, 길오장이, 달래, 무릇, 시금초, 씀바구, 돌나물, 비름, 능쟁이. 들은 온통 초록 전에 덮여 벌써 한 조각의 흙빛도 찾아볼 수 없다. 초록의 바다. 초록은 흙빛보다 찬란하고 눈빛보다 복잡하다. 눈이 보얗게 깔렸을 때에는 흰빛과 능금나무의 자줏빛과 그림자의 옥색빛밖에는 없어 단순하기 옷 벗은 여인의 나체와 같은 것이―---봄은 옷 입고 치장한 여인이다. 흙빛에서 초록으로―---이 기막힌 신비에 다시 한번 놀라 볼 필요가 없을까. 땅은 어디서 어느 때 그렇게 많은 물감을 먹었기에 봄이 되면 한꺼번에 그것을 이렇게 지천으로 뱉어 놓을까. 바닷물을 고래같이 들이켰던가. 하늘의 푸른 정기를 모..

2020 한국근대문학선: 수난

이효석 | 도디드 | 500원 구매
0 0 395 3 0 27 2020-04-03
A는 같은 편집실의 젊은 동료이었다. 평소의 친절을 두터운 우정의 표현이라고만 생각하였던 것이 우정의 한계를 넘어 돌연히 사랑의 고백이 되었을 때 유라는 현혹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그의 친절이 별안간 치장된 함정같이 생각되어서 유라는 황급히 신변을 경계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태도와 눈치가 진하면 진할수록 쌀쌀하게 몸을 지녔다. 이것이 도리어 그의 부당한 반감을 사게 되어 마침내 절교까지에 이르렀다. A는 얼마 안되어 사를 물러가게 되었으나 그후 유라는 일신에 관한 대중없는 중상과 소문을 자주 들을 때마다 그것이 A의 유언의 소치나 아닌가 하고 우울한 날이 많았다. 일면 팔침을 맞았을 때의 남자의 계염과 천려를 슬퍼하고 민망히도 여겼다.

2020 한국근대문학선: 마음의 의장

이효석 | 도디드 | 1,000원 구매
0 0 240 3 0 5 2020-04-03
유라가 소파에 걸어앉아 화집의 장을 번기고 있는 동안에 나는 방 한구석에서 알콜 풍로에 물을 끓이며 차 넣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병든 아내가 치료를 칭탁하고 시골로 내려간 후로는 손수 차 만드는 것이 나의 일과의 하나였다. 차도구의 일절을 방안에 들여놓고 두터운 책상 옆에는 발자크 모양으로 따로 작은 탁자를 붙이고 그 위에 커다란 코오피 잔을 올려 놓았다. 소설은 발자크의 꽁무니에도 못 미치면서― 파코레터에 두 사람분의 모카가루를 분량하여 넣으면서 나는 은근히 유라를 관찰하였다. 요전 음악회에 갔던 때보다도 더 여윈 듯하다. 자부죽이 숙인 고개 밑으로 콧등이 오똑 솟고 눈두덩 밑이 낭떠러지같이 푹 빠졌다. 그 속은 산골짝에 잠긴 조그마한 호수와도 같다. 기다란 속..

2020 한국근대문학선: 계절

이효석 | 도디드 | 1,000원 구매
0 0 273 3 0 8 2020-04-03
천당에 못갈 바에야 공동변소에라도 버릴까?」 겹겹으로 싼 그것을 나중에 보에다 수습하고 나서 건은 보배를 보았다. 「아무렇기로 변소에야 버릴 수 있소.」 자리에 누운 보배는 무더운 듯이 덮었던 홑이불을 밀치고 가슴을 헤쳤다. 멀숙한 얼굴에 땀이 이슬같이 맺혔다. 「그럼 쓰레기통에라도.」 「왜 하필 쓰레기통예요?」 「쓰레기통은 쓰레기만은 버리는 덴 줄 아우― 그럼 거지가 쓰레기통을 들쳐 낼 필요가 없게.」 건은 농담을 한 셈이었으나 보배는 그것을 받을 기력조차 없는 듯하였다. 「개천에다 던질 수밖에.」 「이왕이면 맑은 물 위에 띄워 주세요.」 보배는 얼마간 항의하는 듯한 어조로 말뒤를 채쳤다. 「..

2020 한국근대문학선: 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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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264 3 0 5 2020-04-03
스스로 비웃으면서도 어린아이의 장난과도 같은 그 기괴한 습관을 나는 버리지 못하였다. 꿈을 빚어 내기에 그것은 확실히 놀라운 발명이었던 까닭이다. 두 개의 렌즈를 통하여 들어오는 갈매빛 거리는 앙상한 생활의 바다가 아니요, 아름다운 꿈의 세상이었다. 그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만은 귀찮은 현실도 나의 등뒤에 멀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굳이 도망하여야 할 현실도 아니겠지만 나는 모르는 결에 그 방법을 즐기게 되었다. 비밀은 간단하다. 쌍안경 렌즈에 갈매빛 채색을 베푼 것이다. 나의 생활의 거의 반은 이 쌍안경과 같이 있다. 우두커니 앉아 궁리에 잠기지 않으면 렌즈를 거리로 향하는 것이 이층에서 보내는 시간의 전부였다. 그 쌍안경의 마술이 뜻밖에 놀라운 발견을..

2020 한국근대문학선: 일기

이효석 | 도디드 | 500원 구매
0 0 364 3 0 31 2020-04-02
며칠 전부터 거리에 유숙하고 있는 순회극단의 단장의 딸인 여배우가 지난날 아침 여관 방에서 돌연 해산을 하였으나 달이 차지 못한 산아는 산후 즉시 목숨이 꺼져 버렸다는―근래의 소식을 우연히 아내에게서 듣고 나는 아침 내내 그 생각에 잠겼다. 여배우는 그 전날 밤까지도 무대에 섰다 하니 오랫동안의 불여의한 지방순회에 끌려 다니느라고 기차에 흔들리고 무대에 피곤한 끝에 그 참경을 당하였음이 확실하다. 어린 시체를 동무들과 함께 근처 산에 묻고 온 산아의 아비인 남배우는 울적한 심사를 못이기면서도 저녁 연극이 시작되려 할 때(낯설은 곳에 핏덩어리를 묻은 오늘 오히려 무대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누나) 탄식하고 그의 역편인 <아리랑>의 주연의 화장으로 힘없는 얼굴의 표정을 감..

2020 한국근대문학선: 오리온과 능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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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270 3 0 36 2020-04-02
나오미가 입회한 지는 두 주일밖에 안되었고, 따라서 그가 연구회에 출석하기는 단 두번 임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그의 태도가 전연 예측치 아니하였던 방향으로 흐름을 알았을 때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감정의 움직임이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짧은 시간에 그가 나에게 대하여 그러한 정서를 품게 되었다는 것은 도무지 뜻밖의 일이었음을 나는 놀라는 한편 현혹한 느낌을 마지 않았던 것이다.

2020 한국근대문학선: 프레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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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253 3 0 3 2020-04-02
중얼거리며 몸을 트는 바람에 새까맣게 끄스른 낡은 등의 자가 삐걱삐걱 울렸다. 난마같이 어지러운 허벅숭이 밑에서 는 윤택을 잃은 두 눈이 초점 없는 흐릿한 시선을 맞은편 벽 위에 던졌다. 윤택은 없을망정 그의 두 눈이 어둠침침한 방안에서— 실로 어두침침하므로— 부엉이의 눈 같은 괴상한 광채를 띠었다. 「그러지 말라」는 「죽지 말라」의 대명사였다. 가련한 마르크시스트 주화는 밤낮 이틀 동안 어두운 방에 들어 박혀 죽음의 생각에 잠겨 왔다. 그가 자살을 생각한 것은 오래되었으나 며칠 전부터 그것을 강렬한 매력을 가지 고 그의 마음을 전부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는 진정으로 자 살을 꾀하였다. 첫째 그는 자살의 정당성을 이론화시키려고 애쓰고 다음에 그 방법을 강구하..

2020 한국근대문학선: 돈

이효석 | 도디드 | 500원 구매
0 0 268 3 0 36 2020-04-02
옛성 모퉁이 버드나무 까치 둥우리 위에 푸르둥한 하늘이 얕게 드리웠다. 토끼우리에서 하이얀 양토끼가 고슴도치 모양으로 까칠하게 웅크리고 있다. 능금나무 가지를 간들간들 흔들면서 벌판을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채 녹지 않은 눈 속에 덮인 종묘장(種苗場) 보리밭에 휩쓸려 돼지우리에 모질게 부딪친다. 우리 밖 네 귀의 말뚝 안에 얽어매인 암퇘지는 바람을 맞으면서 유난히 소리를 친다. 말뚝을 싸고도는 종묘장(種苗場) 씨돝은 시뻘건 입에 거품을 뿜으면서 말뚝의 뒤를 돌아 그 위에 덥석 앞다리를 걸었다. 시꺼먼 바위 밑에 눌린 자라 모양인 암퇘지는 날카로운 비명을 울리며 전신을 요동한다. 미끄러진 씨돝은 게걸덕 거리며 다시 말뚝을 싸고 돈다. 앞뒤 우리에서 응하는 돼지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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