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1772

고도순례 경주 (한국문학전집 383)

현진건 | 도디드 | 900원 구매
0 0 396 2 0 41 2016-07-12
7월 8일 아츰 경부선에 몸을 실리다. 행리로는 지팽이 하나 손가방 하나. 단출하고 가든하기 훨훨 날아갈 듯, 죽장망혜로 천리강산을 들어간다는 옛노래의 풍정과 심회도 이러하였으리라. 생각하면 여행다운 여행을 해본 지도 정말 오래간만이다. 5년이 되었는가, 10년이 되었는가. 헤어나지 못하던 공무(公務)와 속무(俗務)를 비록 일시나마 떨치고 표연히 떠나는 것만 해도 얼마나 시원하고 즐거운지. 저번 큰물 진 뒤로 빗방울이 오락가락하던 일기조차 오늘만은 훨씬 개이었다. 새맑은 하늘가엔 목단송이 같은 흰 구름이 뭉실뭉실 피어 오른다. 한강물이 잠깐 붉은 기운을 띤 것은 지난 번 장마의 흔적인가. 질펀한 뫼와 들은 부신 햇발을 안아 푸른빛이 다시금 새로워, 그 싱싱하고 선명한 ..

교섭없던 그림자 (한국문학전집 384)

현진건 | 도디드 | 500원 구매
0 0 319 2 0 42 2016-07-12
못 잊는 여자 이 분홍색 ! 제목이 실없이 나를 괴롭게 하였다. 몇 마디 적기는 적어야 되겠는데 대관절 나에게 그런 알뜰한 이성이 있었던가. 녹주홍등(綠酒紅燈)의 거리에서 손끝에 스치는 가는 버들이 있을 법만 하건마는 그것은 괴어 오른 알코올의 거품으로 가뭇없이 사라졌다. 나는 기억의 사막에 방황해 보았다. 한 송이 어여쁜 꽃을 찾아보려고 한 줄기 그윽한 향기를 맡아 보려고 그러나 나에게 그런 아름다운 행복이 있을리 없었다. 잿빛 안개가 겹겹으로 싸인 사막은 쓸쓸하게 가로 누웠을 뿐이다. 나는 이 빛깔도 없고 윤갈도 없는 지나간 감정 생활을 돌아보매 말할 수 없는 비애가 가슴을 누른다.

동화 (한국문학전집 385)

채만식 | 도디드 | 900원 구매
0 0 316 2 0 34 2016-07-12
그날까지가 ‘동화’고, 그래서 업순이는 그리로 떠났다. 그 안날 낮에 물기가 듣는 듯 그늘 짙은 뒷마루에서 업순이는 바느질이 자지러졌다. (음력으로 칠월) 한여름의 한낮은 늘어지게 길다. 조용하고, 이웃들도 졸음이 오게 짝 소리 없다. 뒤 섶울타리를 소담스럽게 덮은 호박덩굴 위로 쨍쨍한 불볕이 내리쬔다. 오래 가물기도 했지만, 더위에 시달려 호박잎들이 너울을 쓴다. 손 가까운 데 두고 풋고추도 따먹을 겸 화초삼아 여남은 포기나 심은 고춧대들도 가지가 배애배 꼬였다. 그래도 갓난아기 고추자지 같은 고추가 담숭담숭 열리기는 했다. 울타리 밑에서는 장닭이 암탉을 두 마리 데리고, 덥지도 않은지 메를 헤적 이면서 가만가만 쏭알거린다. 키만 훨씬 크지 가지나 잎은 앓고 난..

정차장 근처 (한국문학전집 386)

채만식 | 도디드 | 900원 구매
0 0 288 2 0 27 2016-07-12
밤 열한점 막차가 달려들려면 아직도 멀었나보다. 정거장은 안팎으로 불만 환히 켜졌지 쓸쓸하다. 정거장이라야 하기는 이름뿐이고 아무것도 아니다. 밤이니까 아니보이지만 낮에 보면 논 있는 들판에서 기차길이 두 가랑이로 찢어졌다가 다시 오므려진 그 샅을 도독이 돋우어 그 위에 생철을 인 허술한 판장집을 달랑 한 채 갸름하게 앉혀놓은 것 그것뿐이다. 그밖에 전등을 켜는 기둥이 몇 개 섰고, 절 뒷간처럼 쫓겨간 뒷간이 있고 쇠줄로 도롱태를 달아놓은 우물이 있고, 그리고 넌지시 떨어져 술집, 사탕집, 매갈잇간, 주재소 그런 것들이 초가집, 생철집 섞어 저자를 이룬 장터가 있고.그러나 그러는 해도 이 정거장이 올 가을로 접어들면서 굉장하게 번화해졌다.

인형의 집을 나와서 (한국문학전집 387)

채만식 | 도디드 | 500원 구매
0 0 401 2 0 39 2016-07-12
노라는 지금으로부터 칠 년 전, 그의 나이 열아홉 살 되는 해에 변호사 현석준과 결혼을 하였다. 그때에 벌써 삼십이 넘은 장년의 남자인 현은 노라를 몹시 귀애하였다. 그는 ‘우리 종달새’니 ‘우리 다람쥐’니 하고 노라를 불렀다. 노라도 그를 극진히 사랑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결혼한 지 일년 남짓하여 첫아이 마리아를 낳던 해 현은 과로 끝에 중병이 들어 죽게 앓았다. 그 때문에 노라는 자기 친정아버지의 종신도 하지 못하였다. 그 뒤에 현의 병은 겨우 낫기는 하였으나 다만 병줄을 놓았을 뿐이지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현의 병을 정성껏 보아 주었고, 그런 뒤로부터 현 부부와 친숙하여져 줄곧 지금까지 흉허물없이 한 집안식구처럼 지내오게 된 병든 의사 남병희는 일본의..

저승길 (한국문학전집 378)

홍사용 | 도디드 | 900원 구매
0 0 414 2 0 29 2016-07-07
그 전 날 밤이다. 죽음을 맡아 가지고 다니는, 커다란 흑의사자(黑衣使者)가, 무거웁고 거북한 발을, 잠깐 멈추어, 음침스럽게 섰는 듯이, 어두운 밤에 싸인 병원집은, 옛날에 지겨웁고 구슬픈 죽음이 많았다. 이로는, 함춘원(含春園) 솔숲에 흐트러진 옷자락을 펄럭거리며, 끝 모르는 어둠 나라에서 꿈꾸는, 마음 약하고 몸 약한 불쌍한 무리를, 손짓해 부르는 듯하다. 한 어깨를 으쓱 틀어 출석거리며, 선술집의 굴접시처럼, 희멀뚱거리는 눈을, 두리번거리는 듯한 병원 지붕의 탑시계는, 어렴풋이 열한 점을 가리킨다. 어떻든, 밤도 흉물스러운 밤이요, 집도 음침스러운 집이다.

뺑덕이네 (한국문학전집 379)

홍사용 | 도디드 | 500원 구매
0 0 333 2 0 38 2016-07-07
앞집 명녀 “ (明女)는 도로 왔다지요.” “저의 아버지가 함경도까지 찾아 가서 데려오느라고 또 빚이 무척 졌다우.” “원 망할 계집애도…… 동백기름 값도 못 벌 년이지, 그게 무슨 기생이야. 해마다 몇 차례씩 괜히 왔다 갔다 지랄발광만 하니…….” “이번엔 그 데리고 갔던 절네 마누라가 너무 흉칙스러워서 그랬답니다. 같이 간 점순이 와 모두 되국놈한테로 팔아먹을 작정이었더래.” “저런…….” “그래 명녀 아버지가 찾아가니까 벌써 점순이는 어따가 팔아 버리고 절네 마누라는 어디로 뺑소니를 쳤더라는데…….” “저런, 세상에 몹쓸 년이 있나. 고 어린 것을……. 그래 저이 아버지는 그 소릴 듣고도 가만히 앉아만 있나?” “그럼 가만히 앉았지 어떡허우, 더구나 그 해보가…….”..

정총대 (한국문학전집 380)

홍사용 | 도디드 | 500원 구매
0 0 287 2 0 21 2016-07-07
“그래…… 어째 날더러…… 밤낮 술만 먹구…… 주정만 한다구? 음 그래 그렇게 말해야 옳단 말야……? 천하에 고약한 놈 같으니……. 제가 그래 동네 구장 좀 되기로서니…… 무슨 세도야…… 세도? 흥…… 나는 그 자식 보기 싫드라…… 아직 새파랗게 젊은 애가 대가리는 허옇게 시어 가지고……. 여보 주인 술내우 술내여. 어째 이 모양이여……. 그런데…… 시방 내가 뭐⎯ 랬겠다……? 오 옳지 그 신대가리가 나는 도무지 보기 싫어……. 제가 구장이면 그래 십 년 세도야…… 백 년 세도야! 무어 날더러 밤낮 술만 먹고 주정만 한다구……? 온 꼴같지 않아…… 무어바 ⎯ 루 제가…… 정총대선정전형위원(町總代選定詮衡委員)이라구?” “아니 그것은 어풍(御風) 형이 그렇게 곡해 만해서 들으..

회 (한국문학전집 376)

채만식 | 도디드 | 500원 구매
0 0 346 2 0 24 2016-07-05
한시반이 지나서야 차는 경성역에 닿는다. 중간에서 연해 더디 오는 북행을 기다려 엇갈리곤 하느라고 번번이 오래씩 충그리고 충그리고 하더니, 삼십 분이나 넘겨 이렇게 연착을 한다. 개성서 경성까지 원은 두 시간이 정한 제 시간이다. 그만 거리를 항용 삼십 분씩 사십 분씩은 늦기가 일쑤다. 요새는 직통열차고 구간열차고 모두가 시간을 안 지키기로 행습이 되었기 망정이지, 생각하면 예사로 볼 일이 아니다. 바로 앞자리에 돌아앉았던 중스름한 양복신사 둘이가, 내릴 채비로 외투를 입노라 모자를 쓰노라 하면서, 역시 그런 이야기다. “등장 가얄까 보군!” 베레모자 신사가 혼잣말하듯 하는 소리고, 다른 국방복짜리는 마침 시계를 꺼내 보면서 “꼬옥 삼십오 분 꽈..

사호일단 (한국문학전집 377)

채만식 | 도디드 | 500원 구매
0 0 350 2 0 24 2016-07-05
잠깐 이야기가 끊기고. 모본단 보료를 깐 아랫목 문갑 앞으로, 사방침에 비스듬히 팔꿈치를 괴고 앉아서 주인 박(朴)주사는 펼쳐 든 조간신문을 제목을 훑는다. 잠잠한 채 방안은 쌍미닫이의, 납을 먹여 마노빛으로 연한 영창지가 화안 하니 아침 햇볕을 받아 눈이 부시게 밝고 쇄려하다. 주인 박주사는 방이 밝고 쇄려하듯이 사람도 또한 정갈하고 호사스런 의표와 더불어 신수가 두루 번화하다. 기름을 알맞추, 반듯이 왼편에서 갈라 빗은 짤막한 머리가 우선 단정하다. 마악 아침 소쇄를 하고 난 얼굴이 부윳이 희고 좋은 화색이다. 마흔여섯이라지만 갓 마흔에서 한두 살이 넘었다고 해도 곧이가 들리겠다. 코 밑으로 곱게 다듬어 세운 가뭇한 코밑수염이 한결 그러해 보인다.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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