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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한국문학전집 405)

먼 산은 푸른 안개에 윤곽이 아른하고 담 밑에 저녁연기가 솔솔자자 흐를 때였다. 추근한 땅 위에 부드럽게 내리는 이른 봄 궂은비는 고독한 나그네의 수심을 한껏 돋운다. 전등도 켜지 않은 방 미닫이를 반쯤 열어 놓고 컴컴한 황혼 속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는 나의 몸과 마음은 농후한 자줏빛 안개 속으로 점점 스러져 들어가는 듯하였다. 나는 눈을 감고 머리를 숙였다. 기름을 붓는 듯이 미끄럽게 들리는 빗소리, 삼라만상을 소리 없이 싸고 도는 으슥한 빛, 모든 것은 끝없는 솜같이 부드러운 설움을 휩싸서 여지없는 듯하다. 그 설움은 내 옷을 추근히 적시고 온 모공(毛孔)으로 살금살금 기어 들어서 혈관을 뚫고 붉은 피를 푸르게 물들여서 내 온몸을 안팎 할것없이 속속이 싸고 도는 듯이 안타깝고 아쉽고 그리워 무어라 ..
먼 산은 푸른 안개에 윤곽이 아른하고 담 밑에 저녁연기가 솔솔자자 흐를 때였다. 추근한 땅 위에 부드럽게 내리는 이른 봄 궂은비는 고독한 나그네의 수심을 한껏 돋운다.

전등도 켜지 않은 방 미닫이를 반쯤 열어 놓고 컴컴한 황혼 속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는 나의 몸과 마음은 농후한 자줏빛 안개 속으로 점점 스러져 들어가는 듯하였다. 나는 눈을 감고 머리를 숙였다. 기름을 붓는 듯이 미끄럽게 들리는 빗소리, 삼라만상을 소리 없이 싸고 도는 으슥한 빛, 모든 것은 끝없는 솜같이 부드러운 설움을 휩싸서 여지없는 듯하다. 그 설움은 내 옷을 추근히 적시고 온 모공(毛孔)으로 살금살금 기어 들어서 혈관을 뚫고 붉은 피를 푸르게 물들여서 내 온몸을 안팎 할것없이 속속이 싸고 도는 듯이 안타깝고 아쉽고 그리워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애수를 가슴에 부어 넣는다.

아아 감개무량한 날이요, 감개무량한 황혼이다. 나는 이 봄을 당할 때마다 칠년 전 옛 봄을 생각한다. 한 번 간 후로 소식이 묘연한 김군을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최서해(崔曙海: 1901-1932)

함북 성진 출생. 본명은 학송(鶴松). 성진 보통 학교 5학년 중퇴. 그 후 막노동과 날품팔이 등 하층민의 생활을 몸소 겪음. 1924년 <조선문단>에 <고국(故國)>의 추천으로 등단. <카프> 맹원으로 활동. <중외일보>, <매일신보> 기자 역임. 그는 초기 작품에서 빈궁한 하층민의 삶을 그려내는 계급적인 작가로 활동하였으나, 그 후 시대 의식과 역사 의식을 실감 있게 다루면서 현실성과 낭만성을 다양하게 수용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품으로는 <토혈>, <박돌의 죽음>, <기아와 살육>, <탈출기>,<금붕어>, <그믐밤>, <홍염>, <수난>, <무명초>, <호외 시대>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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