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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그리스도 15

아더 핑크가 12년 이상 연구하면서 성경전체를 조사하면서 출간한 책이다. 의외로 적그리스도에 대해서 종합적으로나 자세히 조사된 자료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아더 핑크의 복음주의적 접근은 아주 귀중한 자료이며 많은 복음주의 진영에서 인용되는 귀한 책이다. 요한계시록 17장에 나오는 중심인물은 "큰 음녀", "붉은 빛 짐승", "열 뿔"입니다. 이 짐승은 분명히 계시록 13장의 첫 번째 짐승입니다. "열 뿔"은 "열 왕"(계 17:12)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큰 음녀"는 누구를 의미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큰 창녀", "여자", "창녀의 어미"에 관한 많은 진술이 있습니다. 첫째, 큰 음녀는 "많은 물 위에 앉아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데(계 17:1..
아더 핑크가 12년 이상 연구하면서 성경전체를 조사하면서 출간한 책이다. 의외로 적그리스도에 대해서 종합적으로나 자세히 조사된 자료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아더 핑크의 복음주의적 접근은 아주 귀중한 자료이며 많은 복음주의 진영에서 인용되는 귀한 책이다.


요한계시록 17장에 나오는 중심인물은 "큰 음녀", "붉은 빛 짐승", "열 뿔"입니다.
이 짐승은 분명히 계시록 13장의 첫 번째 짐승입니다. "열 뿔"은 "열 왕"(계 17:12)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큰 음녀"는 누구를 의미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큰 창녀", "여자", "창녀의 어미"에 관한 많은 진술이 있습니다.

첫째, 큰 음녀는 "많은 물 위에 앉아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데(계 17:1), 계시록 17:15에서는 많은 물이 백성과 무리와 나라와 방언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둘째, "땅의 왕들이 그녀와 음행하였다"(계 17:2)라고 말합니다.

셋째, 그녀는 "붉은 색 짐승"(계 17:3)의 지원을 받습니다. 요한계시록 17:8에서 이 짐승에 대해 말한 것으로부터 그가 마지막 세계를 다스리는 제국을 통치할 적그리스도임이 분명합니다.

넷째, 그 여자는 "자색 옷과 홍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으로 꾸몄다"(계 17:4).

다섯째, "그 이마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곧 비밀: 큰 바벨론"(계 17:5).

여섯째, 그 여자는 "성도들의 피와 순교자들의 피에 취하였느니라"(계 17:6).

일곱째, 마지막 구절에 “네가 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일곱 가지 요점은 우리에게 이 "음녀"에 대한 분석된 요약을 제공합니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해석은 계시록 17장의 "창녀"가 로마 카톨릭 제도를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처녀로 가장했지만 가장 끔찍한 영적 음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가지고 주장합니다. 겸손과 굴욕을 당하셨지만 머리 둘 곳이 없으셨던 복되신 분과 달리 로마교는 은과 금을 탐내며 사치를 과시했습니다. 그녀는 성도들의 피와 불법적인 성관계를 가졌습니다. 계시록 17장의 음녀와 로마 카톨릭 제도 사이의 다른 유사점이 지적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것들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합니까?
아더 핑크는 1886년 영국 노팅험시의 침례교 가정에서 출생했고, 16살의 어린 나이에 ‘청소년 사업가’가 되어서 나름대로 성공했다. 하지만, 부친의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으면서도 회심을 체험하지 못하고 한때는 영매가 되기도 했던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으니, 22세때, 자신의 침실에서 회심을 경험한 것이었다. 찰스 스펄젼이 그랬던 것처럼, 회심과 함께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확신한 그는 설교자가 되었고 1910년에 도미하여, 시카고의 무디성경학교에서 공부했다.이후 미국 동부의 여러 주들과 서부의 캘리포니아 주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설교와 성경연구를 병행하는 ‘순회설교자’로 활동하면서 그는 ‘설교자’로서 명성을 얻었고, 1922년에 자신의 사설 월간지 ‘성경연구’를 창간하여 자신의 성경연구결과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초기 15년 동안은 존 다비나 C.H. 메킨토시 등의 ‘세대주의자들'의 책들을 주로 탐독하였는데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지만, 1920년대 중반부터 그는 찰스 스펄젼 등 청교도들의 글들을 깊이 탐독하면서 청교도 정통신학위에 확고히 섰고 나중에는 ‘세대주의 신학’은 오류로 가득차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1925년부터 3년간의 호주 시드니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영국에서 설교자로 일하기를 바랬으나 자리를 얻지 못하자 미국의 자신의 옛 회중에게로 가서 사역하려했는데 이제 청교도적 신학위에 확고히 서 선포되는 그의 설교는 배척당하게 되었다.

1929년부터 사실상 그의 ‘강단설교사역’은 끝났는데 1929년부터 1934년까지의 빈번한 그의 주거지 변경은 그가 성경연구와 아울러 설교사역을 할 수 있는 길을 찾았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1934년에 그는 영국으로 귀국하여 남부의 호우브에 정착하여 궁핍한 삶 가운데서도 ‘성경연구’와 ‘성경연구지’발행에 몰두하였다. 1930년대 중반 경 그는 이미 청교도서적을 1백만 페이지 이상 읽은 상태였고, ‘성경연구지’에 실렸던 글들을 포함해 여러 권의 단행본들이 출판되었다. 월간 ‘성경연구’에서 그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때까지 연구성과를 발표하였다.‘성경연구지’는 신청하면 누구에게나 무료로 배포되었고, 독자들은 대체로 1,000명 정도였다. 그의 독자들이 그에게 서신으로 ‘신앙상담’을 신청하면, 그는 친절하게 답변해 주었는데 이런 이유로 그와 그의 독자들사이에는 자연스럽게 목자와 양의 관계가 성립되었다. 독자들과 주고 받은 서신이 2만통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지만 그것들 중 일부만이 ‘핑크서간문’이라는 책으로 오늘날 남아있다. 1939년 9월,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 아더 핑크는 안전하고 조용하게 자신의 사역을 진행하기 위해서 영국 북서부의 ‘헤브리디즈 열도’ 중 가장 큰 섬인 루이스 섬의 스톤웨이로 이주한다.루이스 섬은 제주도 정도의 면적을 가진 큰 섬인데, 일찍 산업혁명을 맞아 도시화가 많이 이뤄진 20세기의 영국의 상황에서는 사람도 별로 살지 않는 황량한 곳으로 오늘날도 섬 전체의 인구는 2-3만명 불과하다. 그런 오지였지만, 아더 핑크는 그곳에서 집세를 내는데도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힘들었는데, 세상에서의 부와 명성을 모두 포기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말씀연구의 사명을 묵묵히 감당한 그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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