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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한국근대문학선: 성화

스스로 비웃으면서도 어린아이의 장난과도 같은 그 기괴한 습관을 나는 버리지 못하였다. 꿈을 빚어 내기에 그것은 확실히 놀라운 발명이었던 까닭이다. 두 개의 렌즈를 통하여 들어오는 갈매빛 거리는 앙상한 생활의 바다가 아니요, 아름다운 꿈의 세상이었다. 그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만은 귀찮은 현실도 나의 등뒤에 멀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굳이 도망하여야 할 현실도 아니겠지만 나는 모르는 결에 그 방법을 즐기게 되었다. 비밀은 간단하다. 쌍안경 렌즈에 갈매빛 채색을 베푼 것이다. 나의 생활의 거의 반은 이 쌍안경과 같이 있다. 우두커니 앉아 궁리에 잠기지 않으면 렌즈를 거리로 향하는 것이 이층에서 보내는 시간의 전부였다. 그 쌍안경의 마술이 뜻밖에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그 기괴한 ..
스스로 비웃으면서도 어린아이의 장난과도 같은 그 기괴한 습관을 나는 버리지 못하였다. 꿈을 빚어 내기에 그것은 확실히 놀라운 발명이었던 까닭이다. 두 개의 렌즈를 통하여 들어오는 갈매빛 거리는 앙상한 생활의 바다가 아니요, 아름다운 꿈의 세상이었다.

그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만은 귀찮은 현실도 나의 등뒤에 멀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굳이 도망하여야 할 현실도 아니겠지만 나는 모르는 결에 그 방법을 즐기게 되었다.

비밀은 간단하다. 쌍안경 렌즈에 갈매빛 채색을 베푼 것이다. 나의 생활의 거의 반은 이 쌍안경과 같이 있다. 우두커니 앉아 궁리에 잠기지 않으면 렌즈를 거리로 향하는 것이 이층에서 보내는 시간의 전부였다. 그 쌍안경의 마술이 뜻밖에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그 기괴한 습관을 한결같이 비웃을 수만도 없다.

'유례가 아닌가.'

거리 위를 대중없이 거닐던 렌즈의 방향을 문득 한곳에 박고 나는 시선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그러나 비치는 것은 안정된 정물이 아니요, 움직이는 물화인 까닭에 인물의 걸음을 따라 핀트가 틀어지고 동그란 화폭이 이지러진다. 나사를 풀었다 감았다 하면서 초점을 맞추기가 유난스럽게 힘든다.

'유례일까.'

손가락이 가늘게 떨린다. 눈이 아프고 숨이 막히는 것은 전신이 극도로 긴장된 까닭일까. 한 사람의 인물의 정체를 판정하기에 사실 나는 우스꽝스러우리만치 있는 노력을 다하였다. 행길의 거리가 줄어듦을 따라 흐렸던 렌즈가 차차 개어지더니 초점이 바로 박혀 마침 인물의 모양이 또렷이 솟아올랐다. 듬직한 고기를 낚았을 때와 같은 감동에 마음이 뛰놀았다. 오똑한 얼굴 검소한 차림 찌그러진 구두가 한 걸음 한걸음 눈 속으로 뛰어들어온다. 렌즈의 장난으로 전신이 갈매빛이라고는 할지라도 그것은 꿈속의 인물이 아니요, 어김없는 현실의 인물이다.
이효석은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이때 만난 친구로는 영문학자이자 법학자이며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기초하는데 참여한 유진오, 해방후 초대~5대 국회의원을 연임한 5선 국회의원이자 자유당의 온건파 정치인 이재학이 있었다. 이들은 그의 경성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국대학 역문과 동문으로 졸업 후에도 그와 연락을 주고 받았다.

1928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단편 《도시와 유령》이 발표됨으로써 동반자작가(同伴者作家)로 데뷔하였다. 계속해서 《행진곡(行進曲)》, 《기우(奇遇)》 등을 발표하면서 동반작가를 청산하고 구인회(九人會)에 참여, 《돈(豚)》, 《수탉》 등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젊은 시절의 그는 '가난뱅이 작가'였다. 그는 돈없이 자신의 가난하고 빈한한 처지를 스스로 '가난뱅이 작가'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가난뱅이 작가였던 이효석은 경성 토호 집안이었던 처가에 떳떳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백방으로 직업을 구했다. 중학 시절 은사가 주선해준 취직 자리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였다. 문인들의 작품을 사전 검열하는 곳이다. 동료들의 지탄이 빗발쳤다. 결국 이효석은 열흘 만에 조선총독부를 그만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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