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가 소파에 걸어앉아 화집의 장을 번기고 있는 동안에 나는 방 한구석에서 알콜 풍로에 물을 끓이며 차 넣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병든 아내가 치료를 칭탁하고 시골로 내려간 후로는 손수 차 만드는 것이 나의 일과의 하나였다. 차도구의 일절을 방안에 들여놓고 두터운 책상 옆에는 발자크 모양으로 따로 작은 탁자를 붙이고 그 위에 커다란 코오피 잔을 올려 놓았다. 소설은 발자크의 꽁무니에도 못 미치면서―
파코레터에 두 사람분의 모카가루를 분량하여 넣으면서 나는 은근히 유라를 관찰하였다. 요전 음악회에 갔던 때보다도 더 여윈 듯하다. 자부죽이 숙인 고개 밑으로 콧등이 오똑 솟고 눈두덩 밑이 낭떠러지같이 푹 빠졌다. 그 속은 산골짝에 잠긴 조그마한 호수와도 같다. 기다란 속눈썹은 호숫가에 밋밋하게 늘어선 전나무 수풀이다. 창백한 두 복―좀더 실팍하였건만 지금에는 대패로 민듯이 팽팽하게 가드러 들었다. 그가 보고 있는 그림은 슬픈 그림이다. 하아얀 시이트 위에 누운 병든 소녀의 그림이다―깊게 빠진 눈 위는 검게 그림자 지고 까스러든 속눈썹에 맺힌 눈물이 그 그림자 속에서 구슬같이 빛났다. 검게 질린 입술 사이로 두어 대의 이가 힘없이 드러나 보이고 열어 헤친 가슴 위에 옷섶이 어지럽다. 그 그림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던 유라는 책장을 번기면서 문득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쳐들었다. 반짝하는 맑은 눈방울이 호수 속에 비친 별 그림자와도 같다. 미소를 띠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지새는 달그림자와도 같이 여린 것이요, 그의 표정은 마치 그가 들여다보고 있던 그림 속의 소녀의 그것과도 같이 애잔하고 슬픈 것이었다.
이효석은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이때 만난 친구로는 영문학자이자 법학자이며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기초하는데 참여한 유진오, 해방후 초대~5대 국회의원을 연임한 5선 국회의원이자 자유당의 온건파 정치인 이재학이 있었다. 이들은 그의 경성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국대학 역문과 동문으로 졸업 후에도 그와 연락을 주고 받았다.
1928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단편 《도시와 유령》이 발표됨으로써 동반자작가(同伴者作家)로 데뷔하였다. 계속해서 《행진곡(行進曲)》, 《기우(奇遇)》 등을 발표하면서 동반작가를 청산하고 구인회(九人會)에 참여, 《돈(豚)》, 《수탉》 등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젊은 시절의 그는 '가난뱅이 작가'였다. 그는 돈없이 자신의 가난하고 빈한한 처지를 스스로 '가난뱅이 작가'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가난뱅이 작가였던 이효석은 경성 토호 집안이었던 처가에 떳떳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백방으로 직업을 구했다. 중학 시절 은사가 주선해준 취직 자리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였다. 문인들의 작품을 사전 검열하는 곳이다. 동료들의 지탄이 빗발쳤다. 결국 이효석은 열흘 만에 조선총독부를 그만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