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독특한 정서를 자아내기 족하리만치 굵은 눈 송이가 함박같이 퍼부었다.
연말을 끼고 정리되지 못한 여러 가지 일에 분주한 주화는 종일 회관에서 일을 보다가 조그만 셋방으로 돌아오니 누운 채 깊은 잠이 폭 들었다. 깊은 잠속에 꿈이 새어들고 꿈속 에서 그는 의외에도 한 여성의 방문을 받았다. 너무도 의외 의 인물의 방문에 의아하여 꿈속에서도 그는 눈을 비비고 그를 다시 바라보고 두번째 만나는 그 아름다운 여성의 자 태에 현혹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두어 주일 전에 동무들 과 같이 고향인 관북 방면에 유물론 강연을 갔을 때 S항구 에서 만난 그 여자인 것이다. 가는 곳마다 청중이 적음을 탄식하던 끝에 S항구라 예측 이상의 활기에 기운을 얻은 그 는 강연을 마친 후에 여관에서 그의 강연에 공명한 한 나어 린 아름다운 여성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 엥겔스 거얼이 라고 부를 정도가 채 못되느니만치 생각은 어렸으나 기개만 은 귀엽다고 생각하였다. 나어린 감격 끝에 그는 가정과 일 신상의 형편까지 일일이 주화에게 이야기하였다. 집안은 거 부는 못되나 어머니와 한 분의 오빠를 섬겨서 그리울 것이 없는 지주의 가정이라는 것, 근방의 여자 고보를 마친 후 근 일년 동안이나 가정에 묻혀 있다는 것, 그의 의사를 무 시한 혼담에 졸려 날마다 우울히 지낸다는 것 등등의 사정 을 기탄없이 이야기한 후, 그러한 완고한 가정을 배반하고 진보적 생각으로 세상을 알아볼 결심이라는 것을 말하고 앞 으로 지도를 바란다는 뜻을 간곡히 다졌다. 그의 진보적 생 각이라는 것의 정도를 짧은 시간에 진맥하기는 어려웠으나 그의 형편에 동정하고 기개를 귀히 여겨 청하는 대로 주화 는 서울의 주소까지 적어 주었던 것이다—비록 꿈속일지라도 이 생각지 않았던 처녀의 방문은 전연 뜻밖이었다. 처녀는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주화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기쁨 인지 슬픔인지 목소리를 놓고 울었다. 울음소리는 점점 높 아갔다. 너무도 돌연한 변에 주화는 어쩔 줄 모르고 무죽거 리는 동안에 문득 꿈에서 깨었다. 스산한 느낌이 전신에 쭉 흘렀다. 어느맘 때인지 전등이 희미하게 비치고 밖에서는 처마를 스치는 눈 소리가 설렁설렁 들렸다.
이 때 별안간 문밖에 인기척 소리가 났다. 귀를 기울이니 한참 동안을 두었다가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와 가는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이효석은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이때 만난 친구로는 영문학자이자 법학자이며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기초하는데 참여한 유진오, 해방후 초대~5대 국회의원을 연임한 5선 국회의원이자 자유당의 온건파 정치인 이재학이 있었다. 이들은 그의 경성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국대학 역문과 동문으로 졸업 후에도 그와 연락을 주고 받았다.
1928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단편 《도시와 유령》이 발표됨으로써 동반자작가(同伴者作家)로 데뷔하였다. 계속해서 《행진곡(行進曲)》, 《기우(奇遇)》 등을 발표하면서 동반작가를 청산하고 구인회(九人會)에 참여, 《돈(豚)》, 《수탉》 등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젊은 시절의 그는 '가난뱅이 작가'였다. 그는 돈없이 자신의 가난하고 빈한한 처지를 스스로 '가난뱅이 작가'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가난뱅이 작가였던 이효석은 경성 토호 집안이었던 처가에 떳떳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백방으로 직업을 구했다. 중학 시절 은사가 주선해준 취직 자리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였다. 문인들의 작품을 사전 검열하는 곳이다. 동료들의 지탄이 빗발쳤다. 결국 이효석은 열흘 만에 조선총독부를 그만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