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얼거리며 몸을 트는 바람에 새까맣게 끄스른 낡은 등의 자가 삐걱삐걱 울렸다. 난마같이 어지러운 허벅숭이 밑에서 는 윤택을 잃은 두 눈이 초점 없는 흐릿한 시선을 맞은편 벽 위에 던졌다. 윤택은 없을망정 그의 두 눈이 어둠침침한 방안에서— 실로 어두침침하므로— 부엉이의 눈 같은 괴상한 광채를 띠었다.
「그러지 말라」는 「죽지 말라」의 대명사였다.
가련한 마르크시스트 주화는 밤낮 이틀 동안 어두운 방에 들어 박혀 죽음의 생각에 잠겨 왔다. 그가 자살을 생각한 것은 오래되었으나 며칠 전부터 그것을 강렬한 매력을 가지 고 그의 마음을 전부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는 진정으로 자 살을 꾀하였다. 첫째 그는 자살의 정당성을 이론화시키려고 애쓰고 다음에 그 방법을 강구하고 그리고 가지가지의 자살 의 광경을 머리속에 그렸다.
자살의 정당성의 이론화—삶의 부정과 죽음의 긍정—이것이 가장 난관이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무조건으로 긍정을 하여 왔을망정 한 사람도 일찌기 밝혀보지 못한 「인류 문화 축적의 뜻과 목적」을 그는 생각하였다.
이효석은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이때 만난 친구로는 영문학자이자 법학자이며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기초하는데 참여한 유진오, 해방후 초대~5대 국회의원을 연임한 5선 국회의원이자 자유당의 온건파 정치인 이재학이 있었다. 이들은 그의 경성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국대학 역문과 동문으로 졸업 후에도 그와 연락을 주고 받았다.
1928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단편 《도시와 유령》이 발표됨으로써 동반자작가(同伴者作家)로 데뷔하였다. 계속해서 《행진곡(行進曲)》, 《기우(奇遇)》 등을 발표하면서 동반작가를 청산하고 구인회(九人會)에 참여, 《돈(豚)》, 《수탉》 등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젊은 시절의 그는 '가난뱅이 작가'였다. 그는 돈없이 자신의 가난하고 빈한한 처지를 스스로 '가난뱅이 작가'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가난뱅이 작가였던 이효석은 경성 토호 집안이었던 처가에 떳떳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백방으로 직업을 구했다. 중학 시절 은사가 주선해준 취직 자리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였다. 문인들의 작품을 사전 검열하는 곳이다. 동료들의 지탄이 빗발쳤다. 결국 이효석은 열흘 만에 조선총독부를 그만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