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2천만 형제자매에 향하여 이승만(李承晩)·정한경(鄭翰景) 등 대미위임통치 청원(對美委任統治請願) 및 매국·매족의 청원을 제출한 사실을 들어서 그 죄를 성토하노라. 이(李) 등의 해 청원 제출은 곧 4252년 3월경 아국 독립운동 발발(勃發)과 동시하여 세계의 대전이 종결되자 평화회의(平和會議)가 개설되고, 따라서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성랑(聲浪)이 높았도다. 이에 각 민족이 자유대로 ①고유의 독립을 잃은 민족은 다시 그 독립을 회복하며, ② 갑국(甲國)의 소유로 을국(乙國)에 빼앗기었던 토지는 다시 갑국으로 돌리며, ③ 양 강국간 피차 쟁탈되는 지방은 그 지방 거민(居民)의 의사에 의하여 통치의 주권을 자택(自擇)하게 하며, ④ 오직 덕(德)·오(奧)·토(土)의 각 식민지는 그주국(主國)이 난수(亂首)의 책벌(責罰)로 이를 몰수하여 협약국에 위탁 통치한 바 되었도다.
신채호는 젊은 시절 애국 계몽 운동가로서 주로 언론 저술 활동에 종사했고, 일제하에서는 러시아, 만주, 베이징, 상하이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독립운동가로서 활약했다. 또한 사학자로서 한평생 ‘민족’과 ‘역사’를 화두로 당시 국정과 일본의 불의를 통렬히 비판하며 조선 민중의 혼을 깨우는 데 앞장섰다. 그는 만주와 시베리아의 수많은 유적지들을 직접 돌아다니고 수많은 사료들을 접하면서 우리 고대사(고조선, 부여, 고구려)의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역사에 영혼이 있다면 처참해서 눈물을 뿌릴 것”이라고 통탄했다. 그가 민족 독립과 민중 해방을 위한 방편으로 아나키스트 운동에 투신하게 되면서 독립운동에 있어서 그에 대한 평가는 조금씩 엇갈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행동하는 지성인이라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