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을 자랑하는 동방의 큰 서울로 자타가 허하는 대고구려 장안(長安) 서울의 성문이 고요히 열렸다.
성 밖에서 성문 열리기를 기다리던 적잖은 소민(小民)들은, 성문이 열리자 모두 성 안으로 빨리 몰려 들어갔다.
이 성 안으로 들어가는 만성(萬姓)들과는 외톨이로 한 중년 길손이 역시 천천히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 길손에게는 의외인 것은, 번창을 자랑하던 이 ‘장안’서울의 모든 집 모든 가게가 모두 아직 굳게 문이 잠겨 있고, 거리에 나다니는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으며, 마치 죽음의 도시인 듯 고요하기 짝이 없는 점이었다.
길손은 내심 적잖이 의아한 마음을 품고 무연하게 넓은 장안 서울의 큰 길을 성 안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들어갔다.
들어가다가 어떤 반만치 문이 열린 가게 하나를 발견하고, 그 가게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자기도 성큼 가게에 들어섰다.
“말씀 좀 물읍시다.”
“뭐요?”
“오늘은 이 나라에 무슨 날입니까?”
그 이 나라라는 말이 수상쩍어서인지 주인은 비로소 이 길손에게 주의를 하는 모양이었다.
김동인(金東仁, 일본식 이름: 東 文仁 히가시 후미히토 / 金東文仁 가네히가시 후미히토, 1900년 10월 2일 ~ 1951년 1월 5일)은 일제 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대한민국의 소설가, 문학평론가, 시인, 언론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금동(琴童), 금동인(琴童仁), 춘사(春士), 만덕(萬德), 시어딤이다.
1919년의 2.8 독립 선언과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소설,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였고,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친일 전향 의혹이 있다. 해방 후에는 이광수를 제명하려는 문단과 갈등을 빚다가 1946년 우파 문인들을 규합하여 전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하였다. 생애 후반에는 불면증, 우울증, 중풍 등에 시달리다가 한국 전쟁 중 죽었다.
평론과 풍자에 능하였으며 한때 문인은 글만 써야된다는 신념을 갖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부터 나타난 자유 연애와 여성 해방 운동을 반대, 비판하기도 하였다. 현대적인 문체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꼽힌다. 필명은 김만덕, 시어딤, 김시어딤, 금동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