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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을 읽으며: 생의 반려

등무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을지 않은 일일는지 모른다마는 나는 이 이야기를 부득이 시작하지 아니치 못할 그런 동기를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명렬군의 신변에 어떤 불행이 생겼다면 나는 큰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현재 그는 완전히 타락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의 타락을 거들어 준, 일테면 조력자쫌 되고 만 폭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단순히 나의 변명만도 아닐 것이다. 또한 나의 사랑하는 동무, 명렬군을 위하여 창다운 생의 기륵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 그것은 바로 4월 스무 이렛날이었다. 내가 밤중에 명렬군을 찾아간 이유는(하지만 이유랄 건 없고 다만) 잠간 만나보고 싶었다. 그의 집도 역시 사직동이고 우리집과 불과 50여 간 상거밖에 안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찾아오는..
등무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을지 않은 일일는지 모른다마는 나는 이 이야기를 부득이 시작하지 아니치 못할 그런 동기를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명렬군의 신변에 어떤 불행이 생겼다면 나는 큰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현재 그는 완전히 타락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의 타락을 거들어 준, 일테면 조력자쫌 되고 만 폭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단순히 나의 변명만도 아닐 것이다. 또한 나의 사랑하는 동무, 명렬군을 위하여 창다운 생의 기륵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

그것은 바로 4월 스무 이렛날이었다. 내가 밤중에 명렬군을 찾아간 이유는(하지만 이유랄 건 없고 다만) 잠간 만나보고 싶었다. 그의 집도 역시 사직동이고 우리집과 불과 50여 간 상거밖에 안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찾아오는 일이 별로 없었다. 물론 나는 불묑을 토하고 투덜거린 적이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고는 덮어두기로 하였다. 그 까닭은 그는 사람 대하기를 극히 싫어굻는 이상스러운 청년이었다. 범상에서 벗으러진 상태를 병이라고 한다면 이것도 결국 큰 병의 일종이겠다. 그래서 내가 가끔 이렇게 찾아가곤 하는 것이다.
단편 소설 '소낙비'로 1935년 《조선일보》에 당선되기 2년 전에, 김유정은 「산골 나그네」라는 소설을 개벽사의 문예지 『제일선』에 발표하였다. 이 「산골 나그네」는 김유정이 춘천에 있을 때, 팔미천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다 길가 오막살이에 살던 돌쇠라는 사람의 집에서, 돌쇠어멈으로부터 그 집에 며칠 머물다 도망친 어떤 들병이 여자에 대하여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지은 것이었다고 한다. 같은 해에 「총각과 맹꽁이」(『신여성』 9월호), 「흙을 등지고」 등을 발표했지만, 이들 소설은 그렇게 좋은 반응을 얻어내지는 못하던 차에 1934년 말에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등 세 개의 신문사에 나란히 소설을 응모하였고 그 가운데 『조선일보』에 응모했던 「소낙비」는 1등, 『조선중앙일보』에 응모했던 「노다지」가 가작으로 당선되면서 비로소 문단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등단한 해에 김유정은 자신의 생에 대표작이라 불릴 작품 대부분을 발표하였다. 「금 따는 콩밭」 · 「금」 · 「떡」 · 「만무방」 · 「산골」 · 「솟」 · 「봄봄」 · 「안해」 등의 단편 10편과 수필 3편이 그가 등단한 바로 그 해에 쏟아져 나왔는데, 춘천에서 보고 느꼈던 고향의 정취와 농민들의 곤궁한 생활, 그 자신의 개인적인 불행에서 체험한 감상 등이 그의 소설의 주요 모티프였다. 문단에 이름을 올린 김유정과 절친했던 문우(文友)로는 휘문고보 때부터의 동창이었던 안회남 말고도, 사직동의 매형집에 살 때부터 앞뒷집에 살며 김유정의 생활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던 이석훈도 있었고, 이석훈의 소개로 구인회에 가입한 뒤에 알게 된 이상(李箱)도 있었다. 1937년에 똑같이 「남생이」라는 작품으로 『조선일보』에 등단한 현덕(玄德)도 김유정의 문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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