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를 품은 보드라운 바람이 이따괌리 볼을 스쳐 간다. 그럴 적마다 똔잎은 하나, 둘 곽라당괄가당 공 중을 날며 혹은 머리 위고 혹은 옷고름에 사뿐 얹히 기도 한다. 가지가지 나무들 새에 끼여 있는 전등도 밝거니와 피 광선에 아련히 비치어 연분흥 막이나 벌 여 논 듯, 활짝 피어 벌어진 팥들도 곯기도하다.
(아이구 ! 꽃도 너닥 피니까 어지럽관 ! )
경자는 여러 사람플 틈에 끼여 사뚜라나무 델을 거 닐다가 우인히도 콧등에 스치려는 꼴 한 송이를 똑 따들고 한번 느긋하도록 맡아본다. 맡으면 맡을수록 가슴속은 후련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취하는 둔싶다. 둬서너 번 더 코에 들여대다가 이번에는,
「애 ! 이 꽃 좀 맡아 봐」 하고 옆에 따르는 영애 의 코밑에다 들여대고,
「어지럽지 ? 」
「어지럽긴 뭐가 어지러워, 이까짓 꽃냄새 좀 맡 고 ! 」
「그럴 테지 ! 」
단편 소설 '소낙비'로 1935년 《조선일보》에 당선되기 2년 전에, 김유정은 「산골 나그네」라는 소설을 개벽사의 문예지 『제일선』에 발표하였다. 이 「산골 나그네」는 김유정이 춘천에 있을 때, 팔미천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다 길가 오막살이에 살던 돌쇠라는 사람의 집에서, 돌쇠어멈으로부터 그 집에 며칠 머물다 도망친 어떤 들병이 여자에 대하여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지은 것이었다고 한다. 같은 해에 「총각과 맹꽁이」(『신여성』 9월호), 「흙을 등지고」 등을 발표했지만, 이들 소설은 그렇게 좋은 반응을 얻어내지는 못하던 차에 1934년 말에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등 세 개의 신문사에 나란히 소설을 응모하였고 그 가운데 『조선일보』에 응모했던 「소낙비」는 1등, 『조선중앙일보』에 응모했던 「노다지」가 가작으로 당선되면서 비로소 문단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등단한 해에 김유정은 자신의 생에 대표작이라 불릴 작품 대부분을 발표하였다. 「금 따는 콩밭」 · 「금」 · 「떡」 · 「만무방」 · 「산골」 · 「솟」 · 「봄봄」 · 「안해」 등의 단편 10편과 수필 3편이 그가 등단한 바로 그 해에 쏟아져 나왔는데, 춘천에서 보고 느꼈던 고향의 정취와 농민들의 곤궁한 생활, 그 자신의 개인적인 불행에서 체험한 감상 등이 그의 소설의 주요 모티프였다. 문단에 이름을 올린 김유정과 절친했던 문우(文友)로는 휘문고보 때부터의 동창이었던 안회남 말고도, 사직동의 매형집에 살 때부터 앞뒷집에 살며 김유정의 생활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던 이석훈도 있었고, 이석훈의 소개로 구인회에 가입한 뒤에 알게 된 이상(李箱)도 있었다. 1937년에 똑같이 「남생이」라는 작품으로 『조선일보』에 등단한 현덕(玄德)도 김유정의 문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