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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의 예술

40년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정관 김복진 씨의 이 지역 조각계에 남겨 놓신 공적은 이 땅 반도의 방방곡곡에 모를 이 없을 것이며 따라서 씨의 작 고를 아까이 여기며 슬퍼하지 않을 자 없을지니 이는 반도 조형미술계의 큰 손실인 까닭입니다.
40년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정관 김복진 씨의 이 지역 조각계에 남겨 놓신 공적은 이 땅 반도의 방방곡곡에 모를 이 없을 것이며 따라서 씨의 작
고를 아까이 여기며 슬퍼하지 않을 자 없을지니 이는 반도 조형미술계의 큰 손실인 까닭입니다.
1906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창문사(彰文社)를 경영한 구자혁(具滋爀)의 아들로, 2살 무렵 입은 척추 장애로 평생을 단신으로 살았다. 경신(儆新)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미술에 입문, 고려미술원에서 김복진(金復鎭)에게 조소를 배운 뒤,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했다. 1928년 일본 가와바다[川端]화학교를 거쳐, 1929년 니혼[日本]대학 전문부 미학과에서 수학하고, 1933년 다이헤이요[太平洋]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30년 이과회(二科會)미술전에 조선인으로는 처음 입선했다. 귀국 이후 1934년 목일회(牧日會), 1935년 백만회(白蠻會)의 창립에 참여했고 비평활동도 전개했다. 이외에도 종합문예지 『청색지(靑色紙)』를 창간, 이상(李箱)·이육사(李陸史) 등의 작품을 소개했다. 1939년에는 조선 화단의 '일본 화단화'를 주장하는 글(「조선미전 양화참견기」, 『조선일보』 1939.6.13) 및 '신회화 제작은 화가의 보국'임을 주장하는 글(「조선화적 특이성」, 『동아일보』 1940.5.1~2) 등을 썼다. 특히 「사변과 미술인」(『매일신보』 1940.7.9)에서는 미술인들의 총후봉공(銃後奉公)을 주장했다. 해방 이후인 1946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에서 미술과목 편수사로 활동했으며, 1949년부터 서울신문사 촉탁으로 근무했다. 1953년 2월 2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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