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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당문답

서울 북촌에서도 한 복판인 가회동(嘉會洞)막받이에는 맹현(孟峴)이라는 조그만 한 고개가 있으니 (가회동에서 화동으로 넘어 가는 고개) 그 고개는 세상에서 혹은 또 맹감사재(孟監司峴)라고도 한다. 그러면 그 고개를 어찌하여 맹감사재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그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옛날 세종 대왕(世宗大王)때에 유명하던 맹고불 맹정승(孟古佛孟政丞)이 아직 일국의 정승이 되지 못하고 일개 지방의 감사(監司)로 있을 때에 일찌기 그 고개를 밑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된것이었다.
서울 북촌에서도 한 복판인 가회동(嘉會洞)막받이에는 맹현(孟峴)이라는 조그만 한 고개가 있으니 (가회동에서 화동으로 넘어 가는 고개) 그 고개는
세상에서 혹은 또 맹감사재(孟監司峴)라고도 한다. 그러면 그 고개를 어찌하여 맹감사재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그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옛날 세종
대왕(世宗大王)때에 유명하던 맹고불 맹정승(孟古佛孟政丞)이 아직 일국의 정승이 되지 못하고 일개 지방의 감사(監司)로 있을 때에 일찌기 그 고개를 밑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된것이었다.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졸업하고 한때는 모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시인 및 수필가로서의 면모는 주로 『개벽(開闢)』을 비롯한 몇몇 잡지에 발표된 그의 한시(漢詩)와 수필작품에서 볼 수 있다.

『조선4천년비사(朝鮮四千年秘史)』·『해동염사(海東艶史)』(한성도서주식회사, 1931)·『조선사외사(朝鮮史外史)』(명성사, 1947)·『한국야담사화전집(韓國野談史話全集)』 제4권(서정출판사, 1971) 등을 저술하였다.

『개벽』을 비롯하여 『별건곤(別乾坤)』·『신여성(新女性)』·『농민(農民)』·『학생(學生)』 등 잡지의 주간 또는 기자로서 활약하였다. 한시는 주로 「경주회고(慶州懷古)」·「남한산성(南漢山城)」·「관동잡영(關東雜詠)」·「가야회고(伽倻懷古)」 등의 시제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역사·유적·명승지에 관한 회고적인 것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문체는 한문적인 어투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다음의 예문 “경성(京城)은 나의 고향이 아니지마는 근이십년 성상(星霜)을 차(此)에서 성장하고 차에서 방랑하야 가장 인연이 많고 한누(恨淚)가 많고 애정이 많은 제이고향이다.”(우리의 足蹟)에서 볼 수 있다. 야사(野史)를 바탕으로 한 야담·사화적(史話的)인 저술을 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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