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큰 변란이 일어날 것같으면 하늘의 명령이라 할까 귀신이 한 노릇이라고나 할까 반드시 출처도 모르는 이상한 동요
가 먼저 유행된다. 외국은 그만 두고 우리 나라에서만 말하여도 임진란(壬辰亂)이 일어날 임시에는 소위 「동동곡」이 크게 유행하고, 병자호란(丙子
胡亂)때에는 『호발가 타령』이 유행하였다. 여기 말하는 동학란 때에도 일종의 동요, 즉 『아랜녘 새야 웃녘 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청포 밭에 앉
지 말아 녹두 덩쿨 다 썩는다』라는 노래가 유행하였다.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졸업하고 한때는 모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시인 및 수필가로서의 면모는 주로 『개벽(開闢)』을 비롯한 몇몇 잡지에 발표된 그의 한시(漢詩)와 수필작품에서 볼 수 있다.
『조선4천년비사(朝鮮四千年秘史)』·『해동염사(海東艶史)』(한성도서주식회사, 1931)·『조선사외사(朝鮮史外史)』(명성사, 1947)·『한국야담사화전집(韓國野談史話全集)』 제4권(서정출판사, 1971) 등을 저술하였다.
『개벽』을 비롯하여 『별건곤(別乾坤)』·『신여성(新女性)』·『농민(農民)』·『학생(學生)』 등 잡지의 주간 또는 기자로서 활약하였다. 한시는 주로 「경주회고(慶州懷古)」·「남한산성(南漢山城)」·「관동잡영(關東雜詠)」·「가야회고(伽倻懷古)」 등의 시제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역사·유적·명승지에 관한 회고적인 것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문체는 한문적인 어투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다음의 예문 “경성(京城)은 나의 고향이 아니지마는 근이십년 성상(星霜)을 차(此)에서 성장하고 차에서 방랑하야 가장 인연이 많고 한누(恨淚)가 많고 애정이 많은 제이고향이다.”(우리의 足蹟)에서 볼 수 있다. 야사(野史)를 바탕으로 한 야담·사화적(史話的)인 저술을 주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