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지고 이지러진 달이 떠올랐다.
“저는 그만 가겠어요.”
영애는 일어날 마음도 없으면서 종호의 넙적한 손에 갇혀 있던 손을 슬며시 빼내며 한 손으로는 눈을 비볐다.
“지금 당장에 가지 않더라도 갈 사람이 아니오. 이 밤이 마지막 밤이고, 내일부터는 남남이 될 줄 알면서도 그 정이란 것이 우스운 것이라서 당신을 기가 싫구려. 그래요, 가야지요. 약혼까지 한 여인이 밤이 늦도록 다른 나이와 손을 맞잡고 있는 게 말이나 될 법한 일이요? 더 늦기 전에 어서 가시지요.”
널리 알려져 있는 〈우리의 소원〉의 작사가이다. 호는 석영.
1916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혼자서 서양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 미술교사로 있으면서 〈동아일보〉에 연재된 나도향의 소설 〈환희〉의 삽화를 그렸다.
1922년 극단 예술좌의 첫 공연작품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토월회에 가입하여 신극운동을 펼쳤다. 같은 해 〈백조〉 동인으로 참여해 잡지의 표지를 그렸고, 1924년 파스큘라(PASKYULA) 회원으로 활동했다. 1924년 도쿄[東京]로 건너가 미술공부를 한 뒤, 다음해 귀국하여 동아일보사 학예부장을 거쳐 1928년 조선일보사 학예부장을 지냈다. 이때 연재소설의 삽화를 혼자 도맡아 그렸다.
중앙일보사 고문, 전조선문필가협회 연예부장, 민주일보사 편집위원, 대한영화협회 이사장, 문화공보부 예술위원, 국립극장 위원 등을 역임했다.
1933년 〈조선일보〉에 소설 〈만추풍경〉을 연재한 뒤, 1934년 자신이 쓴 소설 〈춘풍〉이 박기채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지자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영화계에 진출하여 시나리오 작가와 영화감독으로 활동했다. 1937년 시골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젊은 미망인의 사랑을 그린 소설 〈연가〉를 비롯해 〈허무러진 화원〉(문장, 1939. 7)과 평론 〈조선문인인상기 朝鮮文人印象記〉(백광, 1937. 5~6)·〈조선문단 30년 측면사〉(조광, 1938. 10~1939. 1) 등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