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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한국문학전집: 이병각 01)

거름퇴비(堆肥)를 파뒤지던 수탉이「꼬기요 ─」하고 날개를 쳤다. 그러자 울타리 밑에서 놀고 있던 병아리가 일시에 어미닭 품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어미닭은 병아리를 품은 채 핏기 업는 벼슬을 축 ─ 내리트리고 졸기시작하였다. 울타리 옆 감나무 입사귀가 햇빛을 받아 유달리 번적거리고 그늘이 울타리에 오르기 시작한 일흔 점심 때 ─달례(月禮)는 후불(後不)이를 다리고「달갱이」널인 밖을 지키고 있다. 『먹지마라! 이 가시내야!』달례는 후불의 뺨을 갈겼다. 후불이는 못익은 것을 먹다가 들킨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형의 눈초리가 무섭다는 듯이 머리를 숙이고 뺨을 만지작거렸다.
거름퇴비(堆肥)를 파뒤지던 수탉이「꼬기요 ─」하고 날개를 쳤다. 그러자 울타리 밑에서 놀고 있던 병아리가 일시에 어미닭 품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어미닭은 병아리를 품은 채 핏기 업는 벼슬을 축 ─ 내리트리고 졸기시작하였다. 울타리 옆 감나무 입사귀가 햇빛을 받아 유달리 번적거리고 그늘이 울타리에 오르기 시작한 일흔 점심 때 ─달례(月禮)는 후불(後不)이를 다리고「달갱이」널인 밖을 지키고 있다.
『먹지마라! 이 가시내야!』달례는 후불의 뺨을 갈겼다. 후불이는 못익은 것을 먹다가 들킨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형의 눈초리가 무섭다는 듯이 머리를 숙이고 뺨을 만지작거렸다.
1918년안동보통학교 입학, 1924년 서울로 상경하여 중동학교 입학했으나 1929년 광주학생사건에 연루 퇴학당했다. 1930년 일본에 머물렀으나 귀국하여 청년운동, 민중운동을 했다. 이병각은 카프가 해체된 시기인 1935∼36년부터 문단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른 죽음으로 문학적 성취를 이루어내지 못하였다. 평론, 산문, 시에 이르는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작품활동을 하였지만 카프 해소 이후 10여 년으로 그치고 있다. 그는 현실도피적인 성향과 후두결핵으로 문단활동도 활발하게 하지 못하였다. 이병각의 시집은 1940년에 병든 몸으로 직접 한지에다 붓으로 써서 묶은 것이다. 이병각은 아호로 몽구로 불리었고, 인대라는 호적상의 이름은 아버지가 아들의 씀씀이를 걱정하여 이름을 고쳐놓은 것이며 실제 이름은 이병각이다.

영양군 석보면 원리(두들마을)에서 태어난 이병각은 신석초의 회상에 따르면 〈헌헌장부〉였고,〈시학의 추억〉 속에서 중요한 멤버로 기억된다. 『시학』이 5호로 종간될 때까지 매호에 작품을 싣고 있다. 김영식에 따르면 이육사는 이병각 부부가 폐병을 앓자 옆에서 간호했으나 이육사의 건강은 더욱 나빠졌다고 한다. 또한 김유정, 김해강, 김기림, 김소엽 등 작가의 작품론을 썼고, 김유정의 죽음을 애도하는 「여름 제물(祭物)」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는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했다가 퇴학당하고 일본유학 중에서 검거되어 조선으로 송환되어 체포되기도 한다. 이후 조선일보사 기자가 되었고 1935년 이후부터 잡지, 신문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가 1941년 후두결핵으로 요절하게 되어 작품활동의 기간은 몇 년이 되지 않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병각 [李秉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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