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직원 회의에서 결정을 하기까지는 그까짓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되던 것이 막상 이런 여학생들을 정면으로 딱 대하고 보니 수업료를 못 가지고 왔다고 책보를 싸 가지고 당장 돌아가라는 말이 그렇게 수월히 척 나오지 않았다.
자기의 입에서 지금 무슨 말이 나올 것인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그저 전과 같은 국어 시간이거니만 여겨 새끼 제비가 먹을 것을 지니고 돌아오는 어미를 반겨 맞듯이 교단에 올라서자 일제히 경례를 하고 머리를 들어 책을 펼쳐 놓으며 배우고자 반가이 맞아 주는 학생들을 대할 때 선생은 그만 혀가 굳어졌다. 더욱이 서무실에서 지적하여 준 미납자 명부를 보면 전 반(班)의 반수 삼십여 명이 거의가 모두 성적이 좋은 모범생들뿐이었다. 언제나 이 애들 때문에 시간이 재미있었고 또 가르침의 의의도 있었다. 백 번 가르쳐도 알아듣지 못하고 장난만 치는 말괄량이 말썽꾸러기들은 애초부터 상대도 안 되는 존재, 이 학생들 삼십여 명을 몰아내고 누구를 가르친단 말인가. 수업료 이야기는 차마 나오지 않고 선생은 어리둥절 학생들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정치나 이념을 자제하고 또한 계몽적이지 않은 순수 문학을 지향했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평안북도 선천군 출신이며 본관은 수안(送安)이고 아호(雅號)는 우서(雨西)이다.
그는 평안북도 선천의 대지주 집안에서 아버지 계항교(桂恒敎)의 1남 3녀 중 첫째로 출생하였다. 계용묵 그의 할아버지인 계창전(桂昌琠)은 조선 말기에 참봉을 지냈다. 아울러 계용묵에게는 이복 여동생이 3명 있었다.
삼봉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로 상경하여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다녔지만, 할아버지 계창전에 의해 강제로 고향으로 끌려갔다. 성인이 된 뒤 그는 청년기에는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았다.
뒤늦게 일본으로 유학, 도요 대학교 철학과를 다니기도 했다.
1920년 《새소리》이라는 소년 잡지에 《글방이 깨어져》라는 습작 소설을 발표하여 소설가로 첫 등단하였고 1925년 《생장》이라는 잡지에 《부처님 검님 봄이 왔네》라는 시를 발표하여 시인으로 등단하였으며 1927년 《상환》을 《조선문단》에 발표하여 본격 소설가 등단하였다. 《최서방》, 《인두지주》 등 현실적이고 경향적인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이후 약 10여년 가까이 절필하였다. 한때 그는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1935년 인간의 애욕과 물욕을 그린 《백치 아다다》를 발표하면서부터 순수문학을 지향하였고 1942년 수필가로도 등단하였다.
비교적 작품을 많이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묘사가 정교하여 단편 소설에서는 압축된 정교미를 잘 보여주었다. 대표작으로 《병풍 속에 그린 닭》,《상아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