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반 오정이나 바라보토록 요때기를 플산고 누웠던 그는 불현듯 똔을 익으키어 가지고 대문 밖으로 나섰다. 매캐한 방구석에서 흔자 볶을 딴치 볶다가 열벙거지가 번컥 오친면 종로로 뛰어나오는 것이 그의 떠룻이었다.
그러나 종로가 항강 마음에 들어서 그가 거니느냐 하면 그런 것토 아니다. 버릇이 시키는 노룻이라 울분할 때면 마지못하여 건성 싸다닐 뿐 식상은 시끄럽고 더럽고 해서 아탁 애착포 없었다. 말하자면 피의 심청이 별난 것이었다. 곽괄한 젊은 친구가 할 일은 없고 맨날 그낙눋 떤민으로만 지내촌 하니가 나중에 배짱이 돈아앉고 따라 싫청이' 곰지 못하였다. 그는 자기의 불평을 낡의 억굴에 다 침뱉들 땔어붙이기가 일쑤요. 건뜻하면 남의 비위나 긁어놓기로 한 일을 삼는다.
흐게 생각하면 좀 잣다르나 무딘 그 생환에 있어서는 단 하나의 향락일는지토 또글다. 그가 어슬렁어쓸렁 종필로 나오니 그의 양신인 불병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자연은 마음의 거울이다. 원체 심보가 이 뻔새고 보니 눈에 띄는 것마다 모두 아니꼽고 구역이 낙지경이다. 허나 무엇보다도 그의 비위를 강해 주는 건 첫채 거지였다.
단편 소설 '소낙비'로 1935년 《조선일보》에 당선되기 2년 전에, 김유정은 「산골 나그네」라는 소설을 개벽사의 문예지 『제일선』에 발표하였다. 이 「산골 나그네」는 김유정이 춘천에 있을 때, 팔미천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다 길가 오막살이에 살던 돌쇠라는 사람의 집에서, 돌쇠어멈으로부터 그 집에 며칠 머물다 도망친 어떤 들병이 여자에 대하여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지은 것이었다고 한다. 같은 해에 「총각과 맹꽁이」(『신여성』 9월호), 「흙을 등지고」 등을 발표했지만, 이들 소설은 그렇게 좋은 반응을 얻어내지는 못하던 차에 1934년 말에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등 세 개의 신문사에 나란히 소설을 응모하였고 그 가운데 『조선일보』에 응모했던 「소낙비」는 1등, 『조선중앙일보』에 응모했던 「노다지」가 가작으로 당선되면서 비로소 문단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등단한 해에 김유정은 자신의 생에 대표작이라 불릴 작품 대부분을 발표하였다. 「금 따는 콩밭」 · 「금」 · 「떡」 · 「만무방」 · 「산골」 · 「솟」 · 「봄봄」 · 「안해」 등의 단편 10편과 수필 3편이 그가 등단한 바로 그 해에 쏟아져 나왔는데, 춘천에서 보고 느꼈던 고향의 정취와 농민들의 곤궁한 생활, 그 자신의 개인적인 불행에서 체험한 감상 등이 그의 소설의 주요 모티프였다. 문단에 이름을 올린 김유정과 절친했던 문우(文友)로는 휘문고보 때부터의 동창이었던 안회남 말고도, 사직동의 매형집에 살 때부터 앞뒷집에 살며 김유정의 생활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던 이석훈도 있었고, 이석훈의 소개로 구인회에 가입한 뒤에 알게 된 이상(李箱)도 있었다. 1937년에 똑같이 「남생이」라는 작품으로 『조선일보』에 등단한 현덕(玄德)도 김유정의 문우였다.
1934년에 김유정은 사직동에서 혜화동으로 이사하였고, 누나의 집에서 식객살이를 시작했다. 김유정에게는 무수히 많은 원고 청탁이 쏟아져 들어왔고, 김유정 자신도 약값을 벌기 위해 청탁이 오는 대로 글을 썼지만 그나마도 돈이 생기면 술값으로 써버리기 일쑤였다. 《여성》이라는 잡지에 자신이 기고했던 「어떠한 부인을 맞이할까」라는 글과 나란히 실린 박봉자(시인 박용철의 여동생)의 글을 읽게 된 김유정은 다시 얼굴도 모르는 박봉자라는 여인을 향해 무려 31통에 달하는 구애의 편지를 썼지만, 답장은 한 통도 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얼마 뒤 김유정 자신도 잘 알고 지낸 평론가 김환태와 박봉자가 약혼을 했으며 곧바로 결혼했다는 비극적인 소식만 듣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