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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리 (한국문학전집: 김남천 51)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운봉이는 적지 않이 긴장하였다. 마지막 시간에 치른 담임 선생의 태도에 분개에 가까운 흥분을 품은 때문이다. 시간 마감이 가까워서 선생은 교과서를 접더니 느닷없이 상급학교 지원할 생도들은 손을 들라고 한다. 늘상 제 혼자일망정 생각해 오던 바가 있으므로 운봉이도 바른손을 창칼같이 기운차게 뽑아 들었다. 60명 넘는 중에서 단 다섯 아이뿐이다. 누구라고 돌아볼 것도 없이 금융조합장의 아들, 양조소 하는 집아이, 의사 아들, 이 고을서 제일 부자라는 김좌수 손자, 그 틈에 뜻밖에도 김운봉이의 바른팔이 섞인 것이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운봉이는 적지 않이 긴장하였다. 마지막 시간에 치른 담임 선생의 태도에 분개에 가까운 흥분을 품은 때문이다. 시간 마감이 가까워서 선생은 교과서를 접더니 느닷없이 상급학교 지원할 생도들은 손을 들라고 한다. 늘상 제 혼자일망정 생각해 오던 바가 있으므로 운봉이도 바른손을 창칼같이 기운차게 뽑아 들었다. 60명 넘는 중에서 단 다섯 아이뿐이다. 누구라고 돌아볼 것도 없이 금융조합장의 아들, 양조소 하는 집아이, 의사 아들, 이 고을서 제일 부자라는 김좌수 손자, 그 틈에 뜻밖에도 김운봉이의 바른팔이 섞인 것이다.
김남천 (金南天 1911 ~1953)

본명 효식(孝植). 평남 성천 출생.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도쿄[東京] 호세이[法政]대학 재학 중이던 1929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KAPF)에 가입하였고, 안막(安漠) ·임화(林和) 등과 함께 1930년 카프 동경지부에서 발행한 《무산자(無産者)》에 동인으로 참여하였다. 1931년 귀국하여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을 주도하였으며, 여기서 김기진(金基鎭)의 문학 대중화론을 비판, 볼셰비키적 대중화를 주장한 바 있다. 그 후, 1931년과 1934년 카프 제 1 ·2차 검거사건 때 체포되어 복역하였으며, 1935년에는 임화 ·김기진 등과 함께 카프 해소파(解消派)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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