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투철한 지성이 아카데미즘에 반기를 들고 저널리즘 위에서 자기 신장을 꾀하려는 데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 아카데미즘이 민중과의 교섭을 상실하고 점차로 진리 유린과 학문 봉쇄의 성보(城堡)로 변신해 버린 때문이다.
아카데미가 비평의 정신을 상실하여 학문을 대중의 계몽에서 보육하려는 진리 유지의 근본적 성임(聖任)을 망각해 버린 시대에 있어서 발랄한 지성이 합리적 정신에 의하여 자기를 파악하고 자기를 관철하려는 지향을 버리지 않은 채 저널리즘의 위에서 그의 행로를 구하였다는 것은 이 불행한 시대가 희미하게나마 아직도 긍지를 잃지 않았다는 하나의 표지로 될 것이다.
김남천 (金南天 1911 ~1953)
본명 효식(孝植). 평남 성천 출생.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도쿄[東京] 호세이[法政]대학 재학 중이던 1929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KAPF)에 가입하였고, 안막(安漠) ·임화(林和) 등과 함께 1930년 카프 동경지부에서 발행한 《무산자(無産者)》에 동인으로 참여하였다. 1931년 귀국하여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을 주도하였으며, 여기서 김기진(金基鎭)의 문학 대중화론을 비판, 볼셰비키적 대중화를 주장한 바 있다. 그 후, 1931년과 1934년 카프 제 1 ·2차 검거사건 때 체포되어 복역하였으며, 1935년에는 임화 ·김기진 등과 함께 카프 해소파(解消派)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