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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위성공을 위한 투쟁 (한국문학전집: 김남천 32)

내외반동파의 집요한 파괴공작과 방해 모략을 물리치고 휴회 1년만에 소미공동위원회는 지난 5월 20일 소련외상 모로토프씨의 제안대로 재개 되었다. 우리는 공위휴회 1개년 동안에 갖은 형언할 수 없는 고난과 싸워 왔다. 10월 항쟁과 3우러 22일의 총파업을 드는 것으로 남조선의 형제자매들이 공위 재개를 위하여 얼마나 고귀한 희생을 내면서 반동과 치열한 투쟁을 전개 하였는가를 헤아리기에 충분할 것이다. 일층 적확히 인식할 것은 조선에 관한 막부삼상회의 결정 자체가 세계 민주세력의 하나의 커다란 승리였다는 사실이다.
내외반동파의 집요한 파괴공작과 방해 모략을 물리치고 휴회 1년만에 소미공동위원회는 지난 5월 20일 소련외상 모로토프씨의 제안대로 재개 되었다. 우리는 공위휴회 1개년 동안에 갖은 형언할 수 없는 고난과 싸워 왔다. 10월 항쟁과 3우러 22일의 총파업을 드는 것으로 남조선의 형제자매들이 공위 재개를 위하여 얼마나 고귀한 희생을 내면서 반동과 치열한 투쟁을 전개 하였는가를 헤아리기에 충분할 것이다. 일층 적확히 인식할 것은 조선에 관한 막부삼상회의 결정 자체가 세계 민주세력의 하나의 커다란 승리였다는 사실이다.
김남천 (金南天 1911 ~1953)

본명 효식(孝植). 평남 성천 출생.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도쿄[東京] 호세이[法政]대학 재학 중이던 1929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KAPF)에 가입하였고, 안막(安漠) ·임화(林和) 등과 함께 1930년 카프 동경지부에서 발행한 《무산자(無産者)》에 동인으로 참여하였다. 1931년 귀국하여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을 주도하였으며, 여기서 김기진(金基鎭)의 문학 대중화론을 비판, 볼셰비키적 대중화를 주장한 바 있다. 그 후, 1931년과 1934년 카프 제 1 ·2차 검거사건 때 체포되어 복역하였으며, 1935년에는 임화 ·김기진 등과 함께 카프 해소파(解消派)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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