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 명이 이번 봄에 89 전문 정도의 학교를 나와서, 사회로 가정으로 흩어졌다. 이밖에 동경이나 또는 서울 외의 곳에서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이도 많을 것이요 중학교를 졸업한 채 가정으로 돌아온 분도 많을 것이므로 조선사회는 새로이 적지 않은 숫자의 고급 학문의 수업 여성을 맞이한 셈이다.
모두 20 전후의 젊은이들이매, 그들의 가슴속에는 제 각기 하나씩의 아름다운 무지개를 품고 교문을 나섰을 것이다. 이미 이 해도 반이 기울어서 그들의 무지개들이 얼마나 찬란하게 하늘을 장식하고 있는지 차츰 실험기에 들어가고 있다 할 수 있는데, 하나 하나 그것을 조사할 길이 없으니 상세한 바를 묘사할 수는 없다.
김남천 (金南天 1911 ~1953)
본명 효식(孝植). 평남 성천 출생.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도쿄[東京] 호세이[法政]대학 재학 중이던 1929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KAPF)에 가입하였고, 안막(安漠) ·임화(林和) 등과 함께 1930년 카프 동경지부에서 발행한 《무산자(無産者)》에 동인으로 참여하였다. 1931년 귀국하여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을 주도하였으며, 여기서 김기진(金基鎭)의 문학 대중화론을 비판, 볼셰비키적 대중화를 주장한 바 있다. 그 후, 1931년과 1934년 카프 제 1 ·2차 검거사건 때 체포되어 복역하였으며, 1935년에는 임화 ·김기진 등과 함께 카프 해소파(解消派)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