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생활을 의식하고 해 온 지는 불과 2, 3년래의 일이니까, 이 이야기는 작가생활의 회고라고 말할 수 없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예술운동에 발을 들여놓은 최초의 일이고, 단체생활에 관계한 처음이고 보니, 그것이 나의 문학생활에 있던 아무래도 하나의 기념할 만한 시기일 것 같다. 열아홉살 때니까 소화 4년이다. 중학 시대 『월역』동인인 한재덕 씨가(현재 조선 일보 특파원으로 평양에 있다) 동경 시외 구택(駒澤)에 있던 나를 찾아와서, 와세다 교내에서 안막 군(최승희의 부군이래야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을 사귀어 가지고 함께 ‘예맹’ 동경지부에 가맹했는데, 이번 하계휴가에 동경부 소속의 극단이 조선 공연을 나가는데 동행하면 어떤가고 물었다.
김남천 (金南天 1911 ~1953)
본명 효식(孝植). 평남 성천 출생.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도쿄[東京] 호세이[法政]대학 재학 중이던 1929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KAPF)에 가입하였고, 안막(安漠) ·임화(林和) 등과 함께 1930년 카프 동경지부에서 발행한 《무산자(無産者)》에 동인으로 참여하였다. 1931년 귀국하여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을 주도하였으며, 여기서 김기진(金基鎭)의 문학 대중화론을 비판, 볼셰비키적 대중화를 주장한 바 있다. 그 후, 1931년과 1934년 카프 제 1 ·2차 검거사건 때 체포되어 복역하였으며, 1935년에는 임화 ·김기진 등과 함께 카프 해소파(解消派)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