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작가의 동향이란 등등의 제목 밑에 전호 5회에 긍(亘)하여 발표된 박승극의 ‘잡문’을 나는 피할 수 없는 사정에 의하여 최근에 와서야 겨우 살펴볼 기회를 얻었다.
이 ‘잡문’은 시덥지 않은 몇 토막을 제하고 나면 거의 대부분이 ‘김남천은 여하히 유치한가’를 설명하는 논술에 소비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귀중한 시간과 지면을 허비하면서 비상히 중요한 이 증명에 착수한 것은 그보다도 훌륭한 결과를 얻고자하는 정치가적 야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잡문의 종말에 가까운 일절(一節)에서 과언(誇言)함과 마찬가지로 임화와 김남천의 창작논쟁을 원활하게(!) 해결한 것이었다. 그는 말한다. “나는 특별히 임화가 잘했네 김남천이가 잘했네를 분석해 말할 수 없다. 둘이 다 안과 밖의 구별은 있으나 결국은 한가지의 잘못을 범한 때문이다.”
김남천 (金南天 1911 ~1953)
본명 효식(孝植). 평남 성천 출생.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도쿄[東京] 호세이[法政]대학 재학 중이던 1929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KAPF)에 가입하였고, 안막(安漠) ·임화(林和) 등과 함께 1930년 카프 동경지부에서 발행한 《무산자(無産者)》에 동인으로 참여하였다. 1931년 귀국하여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을 주도하였으며, 여기서 김기진(金基鎭)의 문학 대중화론을 비판, 볼셰비키적 대중화를 주장한 바 있다. 그 후, 1931년과 1934년 카프 제 1 ·2차 검거사건 때 체포되어 복역하였으며, 1935년에는 임화 ·김기진 등과 함께 카프 해소파(解消派)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