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朝鮮史) 연구의 제목을 가지고 어떤 까닭으로 중국 위ㆍ진(魏晋)시대 사관(史官)이 지은 『삼국지(三國志)』동이열전(東夷列傳) 같은 것을 취하느냐. 조선 고문헌이 너무 멸망하여 상고의 조선을 연구하자면 마치 바빌론 고사(古史)를 연구하는 자가 헤로도투스의 희랍사에 참고하지 아니할수 없음과 같이 중국 고사에 힘입을 것이 적지 아니하나, 다만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 쓰인 조선열전(朝鮮列傳)은 중국 망명자로 조선의 일우(一隅)를 절거(竊據)한 위씨(衛氏) 일가가 한(漢)과 대항하던 약기(略記)니, 조선열전이라느니보다 도리어 중국유적(流賊)의 침략사라 함이 옳으며
신채호는 젊은 시절 애국 계몽 운동가로서 주로 언론 저술 활동에 종사했고, 일제하에서는 러시아, 만주, 베이징, 상하이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독립운동가로서 활약했다. 또한 사학자로서 한평생 ‘민족’과 ‘역사’를 화두로 당시 국정과 일본의 불의를 통렬히 비판하며 조선 민중의 혼을 깨우는 데 앞장섰다. 그는 만주와 시베리아의 수많은 유적지들을 직접 돌아다니고 수많은 사료들을 접하면서 우리 고대사(고조선, 부여, 고구려)의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역사에 영혼이 있다면 처참해서 눈물을 뿌릴 것”이라고 통탄했다. 그가 민족 독립과 민중 해방을 위한 방편으로 아나키스트 운동에 투신하게 되면서 독립운동에 있어서 그에 대한 평가는 조금씩 엇갈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행동하는 지성인이라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